[류현우의 블랙北스] 북 외교관의 리얼라이프③ 왕따·조롱 감내하는 ‘미사일 코리아’ 외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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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류현우의 블랙북스 진행을 맡은 목용재입니다. 국제 무대의 최전방에서 북한 외교의 실무를 담당하는 외교관들은 현지에서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또 어떤 고충을 겪고 있는지 그들의 ‘리얼라이프(실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고 있습니다. 이들은 해외에 파견돼 북한을 대변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데요. 이로 인해 해외 현지인들의 시선이 곱지 않다고 합니다. 굴욕적인 순간을 겪기도 하고요. 오늘은 이와 관련한 이야기를 류현우 전 쿠웨이트 주재 북한 대사대리로부터 들어보겠습니다.

진행자: 국제사회에서 북한의 평판은 좋지 않은 상황에서 북한 외교관들은 해외로 파견되고 있습니다. 이들은 현지에서 곱지않은 시선을 느끼거나 굴욕적인 순간을 겪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류 대사대리님도 이런 경험이 있으신가요?

류현우: 당연히 있죠. 실례를 하나 말씀 드리겠습니다. 2017년 9월 6일 저희가 쿠웨이트 크라운플라자 호텔에서 연회를 개최했습니다. 9월 9일이 북한 공화국 창건기념일이기 때문에 북한의 국경절입니다. 그래서 이 날을 계기로 호텔을 예약해서 연회를 성대하게 치릅니다. 그래서 9월 6일에 우리가 연회를 하기로 했었는데 9월 3일, 북한이 6차 핵실험을 강행합니다. 이것으로 인해 많은 나라들이 (연회 참석에 대해) 보이콧을 선언했거든요. 이에 대해 항의한다는 그런 표시로 말입니다. 그래서 중국과 러시아를 비롯해 시리아, 쿠바까지도, 북한의 우방국으로 돼 있는 나라들까지도 모두 보이콧을 했습니다. 그런데 한 번 연회를 차리려고 하면 사전 준비를 굉장히 어렵게 진행합니다. 그러니까 적은 인원으로 200여 명 규모의 연회를 치르자니까 사전에 초대장부터 인쇄, 디자인을 다 해야 합니다. 그걸 또 배포해야죠. 사전 준비 사업이 굉장히 어려운데 한 명도 오지 않는다? 이건 얼마나 치욕스러운 일입니까. 그리고, 저희가 공식적인 외교 행사 때에는 북한 외교관들이 100% 모두 김일성, 김정일의 초상이 있는 초상휘장을 달고 참석합니다. 그런데 초상 휘장을 달고 가게 되면 거기에 있던 사람들이 제가 북한 외교관이라는 걸 바로 알거든요. 그래서 그걸 보고서는 (저와) 말을 섞다가 하나, 둘 피해서 제 곁에서 멀어져 갑니다. 그때 왕따라는 기분이 확 듭니다.

진행자: 연회를 열었던 말씀을 하셨는데요. 비용 문제는 어떻게 하셨나요. 그리고 차려 놓은 음식은 어떻게 처리하셨나요?

류현우: 국가에서 보장해 주는 것이 연회 비용으로 한 사람당 1.5유로, 미화 2달러 정도가 됩니다. 이를 기준으로 200명 분의 연회를 한다면 (국가로부터) 400 달러밖에 안 나오잖아요. 이 400달러를 가지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현지 파견된) 건설 회사라든가 저희 관할 하에 있는 현지 주재 회사 그리고 식당, IT 업계에 종사하고 있는 그런 사람들, 그러니까 회사 사장, 당 비서한테 찾아가서 호소를 하는 거죠. 그래서 그 사람들로부터 지원을 받아서 연회를 차립니다. 그런데 대체로 200명 규모의 연회를 열려면 2만 달러 정도가 필요합니다. 5성 호텔에서 하려면 말입니다. 그런데 이 돈을 국가에서 주지 못 하기 때문에 우리가 건설 회사 등을 찾아 다니면서 구걸하는 거죠.

진행자: 남은 음식도 꽤 있었을 텐데, 어떻게 하셨습니까?

류현우: 음식은 (현지 주재) 회사들을 나눠주기도 하고 남은 거는 우리가 먹기도 하고 그런 식으로 처리했습니다.

진행자: 북한은 '핵 강국'을 자처합니다. 그런 나라의 외교관으로서 해외에 나가면 자부심 같은 것을 느끼시나요?

류현우: 제가 해외에 나가서 느낀 점은 북한에 대해서 '말썽꾸러기', 그리고 '못 사는 나라', '인권 불모지', 이런 이미지가 많습니다. 한 가지 제가 실례를 든다면 제가 쿠웨이트에 임명돼서 2016년 12월 즈음 전화기를 개설하기 위해 핸드폰 매장을 한 번 방문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제 앞에 현지인이 있더라고요. 그 사람이 제가 초상 휘장 달고 있는 걸 보더니 저보고 손짓으로 미사일 날아가는 흉내를 냅니다. 그리고 또 핵 폭탄이 터지는 소리를 흉내내면서 저 보고 "미사일 코리아?"라고 물어보더라고요. 얼마나 망신스럽습니까? 그래서 말 안 하고 가만히 있었더니 다시 돌아서면서 "당신 국가는 4신 고사총으로 사람을 쏴서 죽이냐" 그러는 겁니다. 그래서 "그것은 다 거짓말"이라고 그랬더니 핸드폰에서 유튜브 동영상을 저에게 보여주는 겁니다. "4신 고사총으로 당신들이 사람을 쏴 죽인다는 거, 맞는가?"라고 해서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당신들은 왜 그렇게 숨 막히게 사냐"는 그런 말도 하더라고요. 그래서 국가 위상이라는 게, 이렇게 일반 시민한테도 유린 당한 겁니다. 이런 국가가 얼마나 창피합니까. (이럴 때 제가) 외교관이라는 것 자체가 치욕스러운 일이죠.

진행자: 북한이 스위프트(SWIFT), 그러니까 국제은행간통신협회에서도 퇴출됐어요. 북한이 외교 업무 하는 데 있어서 좀 장애가 많았을 것 같습니다. 특히 스위프트에서 퇴출되면서 본국에서 현지로, 현지에서 본국으로의 송금 문제에 상당한 제약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어떻게 대처하셨습니까?

류현우: 제가 쿠웨이트에 나가 있을 때, 2017년 3월 (조선)중앙은행, 대성은행을 비롯해서 북한의 주요 은행들이 100% 모두 스위프트에서 퇴출당했습니다. 그때 당시 미국이 바랐던 것은 북한으로 흘러 들어가는 모든 자금줄을 차단하는 게 미국의 목적이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스위프트라는 건 은행 간 서로 송금할 수 있도록 하는 그런 시스템이 아닙니까. 그런데 스위프트에서 퇴출을 당하니, 북한 은행들이 다른 (국가의) 은행들에 송금할 수 없습니다. 북한 대사관들에 대한 송금이 안 되니까 대표부 유지비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베이징까지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서 그곳에서 돈을 갖고 날아오는 겁니다. 대사관 유지비는 그런 방식으로 운반해서 썼습니다.

진행자: 대사관 유지비라면 상당한 양일 것 같아 무거울 것 같습니다. 또 얼마나 자주 그렇게 현금을 운반하셨는지도 궁금합니다.

류현우: 빈도수는 정말 많죠. 그런데 무게는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한 번도 북한 당국이 배부르게 준 역사가 없습니다. 당국이 기껏 줘봐야 20만 달러가 최고입니다. 20만 달러라는 게 1만 달러를 쭉 세워놓게 되면 두 묶음 밖에 안 되거든요. 작은 양입니다. 그러니까 사이즈 상으로 걱정할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대신 외교관들이 왔다갔다하는 번거로움이 좀 힘들죠.

진행자: 보통 1년에 몇 차례 현금을 운반하십니까?

류현우: 분기에 한 번씩 왔다갔다하는 케이스가 많았습니다. 최고 많이 줘야 20만 달러고 어느 때는 10만 달러, 10만 달러라고 해봐야 3~4개월 정도면 다 사용합니다.

진행자: 최근 북한 대사관 관련 이슈가 있었습니다. 북한이 해외 공관을 정리했는데 이것이 경제적인 이유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습니다. 이를 어떻게 보십니까?

류현우: 지난해부터 북한 해외 공관들이 줄지 않았습니까? 사실 2019년부터 이런 말이 계속 논의돼 왔습니다. 그러니까 2019년 6월로 기억되는데, 그때 북한으로부터 전보 한 장이 날아왔습니다. 그 내용을 보니 "이제부터 긴축 정책에 들어가니 대사관들이 모든 유지비를 아껴 써라", 절약하라는 의미였습니다. 또 2018년부터 해외에서 일하는 (북한) 노동자들이 2018년부터 조금씩 철수를 합니다. 그리고 대북제재 결의에 따라 북한 수출품목의 100%가 다 막힙니다. 수출품이 없으면 외화를 못 벌지 않습니까? 그래서 자금이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자세히 보시면 2018년 즈음부터 북한이 해킹을 통해 가상화폐를 탈취하는 사례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납니다.

진행자: 북한 외교관으로서 외교가에서 '왕따'를 당하고 있음을 느꼈다는 류현우 전 대사대리의 말씀을 들으니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특히 현지인이 류 전 대사대리에게 '미사일 코리아'라고 내뱉은 조롱은 북한을 향한 국제사회의 시선을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실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류현우의 블랙北스, 다음시간에도 류현우 전 쿠웨이트 주재 북한 대사대리로부터 해외 주재 북한 외교관들에 대한 궁금했던 실생활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다음 시간에 청취자 여러분들을 다시 찾아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에디터 양성원, 웹편집 한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