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의 교훈을 잊고 핵전쟁을 준비하는 김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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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간부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7월 27일은 스탈린의 지령을 받은 김일성이 1950년 6월 25일 새벽 무렵 남침한 것으로 발발했던 한국전쟁이, 정전협정의 발효로 포성이 멈춘 휴전 67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용서할 수 없는 김일성 일당의 천인공노할 전쟁범죄를 반드시 심판해야 한다는 역사적 소명을 다시 깨우치게 합니다.

왜 김일성 일당은 6·25남침을 자행했는가? 그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자유대한민국으로 탄생한 남한을 무력으로 점령하여 적화통일을 달성하겠다는 조선노동당 국토완정의 야망을 성취하려는 목적이 있었지만, 그 배후에는 전 세계적 규모에서 패권을 장악하여 미국을 비롯한 자유세계를 붕괴시켜 보겠다는, 모스크바 크렘린에 둥지를 틀었던 스탈린의 야심이 있었습니다. 1905년 노일전쟁의 패배로 극동지역에서 태평양으로 진출하려던 제정(차르) 러시아의 부동항(얼지 않은 항구)을 확보하기 위한 전략이 좌절된 후 40년간 변함없이 시도했던 크렘린의 남하정책을 성취해 보려는데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이 방송을 듣고 계신 로동당 간부 여러분이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종식된 직후 1945년 9월에 개최되었던 런던외상회의, 미·영·소 3개국 런던외상회의에서 당시 소련의 외상 몰로토프는 전후처리문제를 제기하며 극동에서 소련이 일본의 북해도 점유와 일본에 대한 군정에 소련이 참가하겠다고 제의한 바 있었습니다. 이미 북한 땅은 점령했지만 남한 땅은 미국이 점령하였으니 일본 북해도의 점령과 일본에 대한 점령군의 군정, 사실상 미군의 군정에 참가함으로써 태평양 진출의 교두보를 확보하겠다는 계략이었지요. 그 구체적인 기도는 일본의 북방4개 도서를 8월 15일 일본군이 이미 항복한 후에 8월 하순부터 9월까지 군사적으로 점령한 사실을 봐도 알 수 있습니다. 크렘린정권은 이렇게 스탈린의 남진전략을 위해 소련의 괴뢰정권인 김일성 북한정권, 여러분 당의 정권을 이용한 점이 있습니다. 충실한 스탈린의 충복이었던 김일성은 스탈린 대원수가 제공해준 탱크 242대, 자주포 176포, 전투기와 정찰기 약 500대, 박격포 1,800문 등 남한 국군의 6~7배의 무장력과 20여만의 막강한 절대우위병력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이중에는 며칠 전까지 중국 대륙에서 장개석군과 싸웠던 중공군 소속 조선족병사들로 2개 사단이나 편성되었습니다. 김일성은 그들을 이용해 아직 38도선의 철조망 방어선조차 제대로 치지 못했던 남한 국군을 기습 공격하여 그해 8월까지 낙동강까지 밀고 내려와 말 그대로 대구·부산 점령이 목전에 이룬 듯 했습니다. 그러나 6.25남침을 평화에 관한 파괴로 규정한 유엔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 1950년 6월 27일 유엔안보리결의안(S/1511)호에 의거하여 미국주도하에 통합군사령부가 조직되고 16개 국가가 참전하며 대응함으로써 김일성 일당의 무력남침계획이 좌절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해 9월 15일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전·후방이 차단된 북한군은 더 이상의 공세작전이 불가능해져 급기야 38도선 이북으로 후퇴하게 되었고, 10월 18일 마침내 평양이 한국군과 유엔군에 의해 점령당했습니다.

당 간부 여러분! 북진하는 한국군 선발대가 마침내 압록강 물을 떠 서울로 보내며 이제는 여러분 당의 적화통일계획을 박멸함과 동시에 스탈린의 세계적화전략, 패권기도를 좌절시키게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10월 중순 중공군의 개입으로 신의주까지 진격하려던 국군과 유엔군은 전략적 후퇴를 불가피하게 해야 했습니다. 젊은 당 간부 여러분은 당시 여러분 당의 처지를 모르리라 생각되기에 간단히 지적하겠습니다. 1950년 6·25무력남침 당시의 김일성의 군사전략지식은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오로지 소련, 크렘린, 스탈린 대원수의 명령수행에 충실했던 그였기에 소련식 군사작전 아니 소련군 고문단의 지시에 따라 작전에 임했을 뿐입니다. 때문에 당시 전선지휘관들은 김일성이 정규군 대대급 부대, 아니 중대급 부대라도 지휘한 경험만 있었더라도 이처럼 무모한 작전을 지시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혹평했습니다.

겨우 빨치산 투쟁한다고 20~30명을 데리고 일본 경찰소, 파출소나 습격했던 그 작전술로 무슨 전쟁을 한다는 말입니까? 그러니 수십만의 대군을 항미 원조 즉 ‘미국에 대항하여 조선을 지원한다’는 구호 하에 한국전에 개입한 중공군 지휘관들이 김일성을 믿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중공군과 연합사령부를 편성할 때 “사령관은 중공군이 맡고 부사령관은 북한군이 맡는다. 연합작전을 수행할 때 모든 작전지휘는 중공군 지휘관이 맡는다”는 합의를 하게 된 것입니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일단 숨을 돌리게 되자 김일성은 1950년 12월 21일부터 23일까지 자강도 만포군 별오리에서 제2기 3차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를 열고 ‘6월 이후 6개월 간 작전현황’을 총괄했습니다. 이때의 김일성의 지적을 보면 6·25남침이 얼마나 무모한 전략계획 하에 전개되었는가를 알 수 있었습니다. 남침당시 미국이 개입할 것이라고는 추호도 생각하지 못하고 그저 준비된 20만의 무장력으로 남침을 자행하면 적화통일과 공산혁명을 바라는 남한 인민대중이 일떠나 북한군을 맞이해줄 것이라고 판단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잘못의 책임을 자신이 져야함에도 불구하고 최고사령관이라는 김일성은 무정을 비롯한 일선 지휘관 특히 중국연안계, 소련계, 남로당계 지휘관에게 책임을 전가했습니다. 이 별오리 3차 당중앙군사위원회 전원회의 이후 휴전이 성립되는 1953년 7월까지 여러분 당의 군대라는 인민군은 뒷전에 몰리고 대부분의 작전은 중공군이 담당했습니다. 중공군 지휘관들은 김일성을 비롯한 인민군 지휘관은 전쟁과 전투, 전략과 전술을 이해하지 못하는 애송이로 취급했습니다. 그러니까 휴전제의도 김일성이 아니라 소련과 중공이 제시했습니다.

정전협정이 성립된 지 67년이 지난 지금도 남한 국민들은 김일성일당의 6·25남침을 잊지 않으며 더욱이 3대 세습으로 고통 받는 북한 동포들을 잊지 않고 해방의 그날을 위해 싸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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