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 간부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10월 10일은 여러분 당의 창당 기념일입니다. 당 간부 여러분은 여러분 당의 과거를 어떻게 평가합니까? 조선로동당의 역사를 누구보다 잘 아는 노간부들의 회고가 해외에서 기록으로 편찬되어 널리 읽히고 있습니다. 특히 1945년 8월 해방 이후 1950년대까지 10여 년간 여러분 당과 북한 정권수립을 위해 혼신을 다했던 소련 국적의 고려인들 그리고 소련군과 함께 북한에 들어와 인민공화국 정부수립을 설계하고 건설했던 그분들의 회고록을 읽으면 오늘날 북한에서 출판된 ‘조선로동당 당사’가 얼마나 왜곡된 거짓 기록인지, 낯뜨거운 개인 숭배 기록인지 알 수 있습니다.
과연 누가 여러분 당을 창당했는가? 누가 무엇을 했는가? 다시 한번 진실을 되찾는 노력이 필요할 때라고 생각하기에 몇 가지 지적할까 합니다.
당 간부 여러분! 여러분도 알고 있는 대로 조선공산주의 운동은 1920년대부터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우리 선대에 의해, 독립운동과 함께 전개되었습니다.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이 ‘조선공산당’이라는 조직을 만든 시기는 1925년 4월이었습니다. 그러나 일제의 모진 탄압이 4~5차례 계속되어 수백 명의 당원들이 체포, 구금되다 보니 1920년대 말에는 완전히 붕괴 되었고 겨우 개인별로 연계를 맺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다가 1945년 8월 해방을 맞은 것입니다. 그러자 지하에서 공산주의 사상을 견지해왔던 국내 공산주의자들이 지상으로 나와 무너진 공산당의 재건에 나섰습니다. 그 대표적 인물이 박헌영, 김용범, 현준혁, 오기섭, 이주하, 김삼룡 등이었습니다. 드디어 9월 11일 서울에서 박헌영이 조선공산당의 재건을 선언했고 이에 따라 13개 각도에 지방조직이 창립되었습니다. 당시 평양을 비롯한 38도선 북쪽에 있던 공산주의자들도 마땅히 조선공산당의 중앙본부는 서울에 위치해야 한다고 판단하고 북한의 각 도마다 지방조직을 구성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공산당 재건을 견제한 세력이 바로 소련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소련군 극동군사령부 산하에서 활동한 88특수여단의 조선인들 즉 김일성, 최용건, 김책 등을 내세워 공산당 조직의 주도권을 장악할 것을 구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들의 귀국이 늦어져, 서울에서 박헌영을 중심으로 한 국내 공산주의자들이 당 재건을 선언한 후인 10월에야 이북 5도의 공산당 조직에 착수한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소련군이 주둔한 북한지역에 별도의 공산당 조직을 만들려던 계획도 당연히 불가능해졌습니다.
그래서 1945년 10월 10일부터 13일까지 김일성을 비롯한 70여 명이 참가하여 ‘이북 5도 당책임자 및 열성자대회’라는 것을 개최해서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을 조직한 것입니다. 왜 북조선 분국인가? 레닌이 결정한 코민테른 규정에는 한 나라의 공산당 조직은 하나여야 한다는 ‘1국 1당 원칙’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소련군과 미군에 의한 38도선 남북분할점령이 굳혀지니 소련은 북한에 위성국가를 수립할 수 있는 호조건을 만들기 위해 ‘북조선 분국’을 통일적인 이북 5도의 중앙당 본부로 개편하기로 했습니다. 따라서 1945년 12월 17일~18일 ‘북조선 분국 제3차 확대중앙위원회’를 개최하여 ‘북조선공산당’으로 개칭한 것입니다. 그런데 1945년 11월 입북한, 중국의 모택동 지도하에 연안에서 활동했던 공산주의 집단이 1946년 1월 15일 ‘조선신민당’을 창당하여 북조선공산당의 세력 확장을 견제하더니 1946년 2월 3일에는 서울에 당 조직을 만들었고 나아가 남한 전 지역으로 확대하며 박헌영 주도의 조선공산당까지 견제하는 현상이 노정되었습니다.
왜 조선신민당이 이처럼 급속히 확장되었는가? 그 이유는 혁명이론과 그 실천문제를 위시한 조직 운영 능력의 차이에 있었습니다. 소련파는 스탈린을 믿고 관료적이며 형식적이며 독선적인 태도를 취했지만 마르크스-레닌주의 혁명이론의 지식면에서는 훨씬 뒤져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중 앞의 선전선동에서 조선신민당이 현저히 앞섰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현실에 직면하자 소련과 북조선 공산당의 김일성 일파는 위기의식을 느낄 수밖에 없었고 이를 해소할 방침으로 유사한 공산주의자 단합을 명분으로 들어 양당의 합당을 제의했습니다. 결국 1946년 8월 28일 평양에서 북조선공산당과 조선신민당의 합당이 성립되었고 중앙위원장은 신민당의 김두봉이, 부위원장에는 김일성과 주영하가 지명되었습니다. 이때부터 당명이 ‘북조선로동당’으로 개칭된 것입니다.
이처럼 북한에서는 소련의 계획하에 일사천리로 공산당 1당 지배체제를 형성하고 소련의 위성국가 수립을 위해 매진하던 시기에, 남한에서는 박헌영 주도의 조선공산당이 좌경급진투쟁노선을 채택함으로써 미군의 강력한 통제와 남한 인민의 저항에 직면하여 급속히 당세가 줄어들었습니다. 박헌영은 이런 악화된 정세 극복을 위해 백남운의 ‘남조선신민당’, 여운형의 ‘조선인민당’과 합당하여 1946년 11월 23일 ‘남조선로동당’을 결성했습니다.
그러나 그후 남북한의 정세는 급변하여 1948년 봄부터 유엔이 조선의 통일정부수립을 논하게 되고 1948년 8월 대한민국을 유일합법정부로 선포했습니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9월 9일 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하고 남북 로동당의 통일정부수립을 표방하며 남조선로동당의 박헌영을 부수상 겸 외무상으로, 이승엽을 사법상으로, 허성택을 노동상으로, 박문규를 농림상으로 임명했습니다. 그러고는 다음해인 1949년 6월 30일과 7월 1일 평양에서 ‘남북조선 로동당 대회’를 개최하고 형식상 2개의 로동당을 하나로 통합하여 ‘조선로동당’을 결성했고 그후 지금까지 75년간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당 간부 여러분! 김일성이 당 중앙을 장악한 이후, 70여 년간 여러분 당은 한시도 안정된 시절이 없었고 초조와 불안, 피의 숙청이 연이은 시절이었습니다. 김정일 시대는 수백만 인민이 기아와 영양부족으로 죽어가는 고난의 행군이 있었고 지금은 핵개발에 전력을 쏟아서 국제 제제 하에 북한 인민들이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김정은 시대가 개막된 후 지난 10년간의 당내 투쟁사, 숙청사만 봐도 피로 물든 암흑의 역사가 아닙니까? 이제는 그만해야 할 때입니다. 진실을 덮을 수는 없습니다. 개혁 개방으로 당내 민주주의를 부활시켜 활기찬 당으로 개혁해야 할 때임을 강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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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양성원, 웹편집 이경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