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서울-브라보 마이 라이프] 초원에 선 수학자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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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이맘때쯤, 남한 대부분의 상급 학교에서 중간고사를 봅니다. 이번 주부터 시험이 시작되는데요. 중학교 1학년은 예외입니다. 자율학기제 혹은 자율학년제가 적용되기 때문인데요. 자율학기제 1년 동안은 학생의 소질과 적성을 키울 수 있는 다양한 체험 활동을 중심으로 교육과정이 운영됩니다. 따라서 남한의 학생들은 중학교 2학년이 되어서야 석차가 메겨지는 첫 시험을 보게 되죠. 평소 학습에 소홀했다면 낭패 보기 쉽습니다. 시험 보는 과목이 많은 경우 포기하는 과목도 생겨나는데요. 대표적인 과목이 ‘수학’입니다. ‘수학 포기자’ 줄여서 ‘수포자’라는 말까지 있는데요.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수학… 좋아하세요? 수학이 재밌나요?

대부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것 같은데요. 수학이 재미있다는 탈북 청년이 있습니다. 그 청년, <여기는 서울>에서 만나봅니다.

(인터뷰)저는 2016년도에 한국에 온 이정호라고 합니다.

오늘의 주인공! 한국에 정착한 지 올해로 6년 차 가 된 이정호 군 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수학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하면… 왠지 고리타분하고 작은 체구에 웅크리고 앉아서 숫자와 씨름을 하는 모습이 연상되는데요. 정호 군을 본 순간 그것이 저의 편협한 생각임을 알게 됐습니다. 180cm의 훤칠한 청년, 정호 군의 얼굴이 낯익습니다. 이정호 군은 2016년 한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장본인이기도 합니다.

(뉴스 보도 중)홍콩 주재 한국 총영사관이 탈북자 한 명을 보호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현지 언론은 수학올림피아드 대회에 출전했던 18살 북한 학생이 망명을 요청했다고 보도했습니다. / 그런데 이 학생이 3년 연속 국제수학올림피아드에서 은메달을 수상한 수재 학생이라고 홍콩 언론이 보도했습니다.

올림피아드는 한 나라의 기초과학 또는 과학교육 수준을 평가하는 국제 청소년 수학 경시대회입니다. 쉽게 말해 각국의 수학영재들이 모여서 실력을 겨루는 대회인 거죠. 이런 큰 대회에서 정호 군은 네 차례나 메달을 수상했는데요. 이 정도 실력자라면 일상생활 속에서도 수학 생각뿐일까요?

(이정호)그거는 많은 사람의 오해인 것 같아요. 수학을 하고, 수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든 걸 수학만으로 생각한다? 제가 볼 때 그거는 조금 선입견인 것 같아요. 물론 수학적 생각이 먼저 떠오르긴 하겠지만 다각적 면을 볼 수도 있거든요. 저의 경우만 해도 다른 비슷한 생각도 떠오르긴 하니까요. 모든 걸 수학과 연관 짓는다? 그거는 약간 선입견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수학’하면 숫자를 계산하고 크기를 측정하는 과목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정호 씨에게 수학은 단순히 공부해야 하는 과목이 아닙니다. 대학에서 수학을 전공하고 있는 정호 씨에게 수학은 이제 삶의 과정에 있어 중요한 도구이자 인생입니다. 정답이 있는 수학 문제와 정답이 없는 인생! 둘은 어쩐지 닮은 곳이 없어 보이는데… 정호 씨는 다른 답을 말합니다.

(이정호)수학이랑 인생은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인생은 나중에 어찌 될지 모르는 거니까요. 수학도 마찬가지로 어찌 될지 모릅니다. 그걸 풀기 전까지는 길이 안 보이는 거죠. 그 길을 만들어 가는 게 수학이고 본인이 만들어 가는 게 인생입니다. 수학의 공식이 있다고들 하는데 실제로는 공식이 없어요. 공식을 만들어 가는 거죠. 인생에도 어떠한 공식들이 있어요. 예를 들어서 내가 연애를 하고 싶다면 소개팅에 나가야죠. 그런 공식적 과정이 있지만 소개팅 나간다고 해서 다 연애를 하는 게 아니잖아요. 수학에서 오일러 공식을 알고 쓴다고 해서 문제가 풀리는 게 아니에요. 그런 도구를 사용해서 어떻게 길을 찾느냐 하는 게 문제죠. 실제로 피타고라스 정의를 증명하는데 400가지가 방법이 있다고 해요. 사람마다 생각이 너무나도 다양하고 창의적인 사람도 많고 여러 가지이기 때문에 그런 면에서 저는 인생과 수학은 비슷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수학 문제에서 정답을 찾는 방법이 한 가지만 있는 게 아니라 무수히 많은 방법이 있는 것처럼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도 여러 가지라고 말하는 정호 씨의 말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남한에는 ‘수학 포기자’ 줄여서 ‘수포자’가 있지만 북한에는 이런 말 자체가 없다고 정호 씨는 설명하는데요. 그렇더라도 상급 학교 진학 시험에서 수학의 비중은 높은 것 같습니다.

(이정호)북한에서 수학을 되게 중요한 과목으로 생각하는 건 확실합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시험을 볼 때 수학 시험을 두 번 보거든요. 저 같은 경우 북한의 제1중학교를 시험 볼 때 다른 과목은 하나도 안 보고 수학만 만점 맞고 입학했거든요. 왜냐하면 수학 문제가 어려운데 만점 받는 사람은 거의 없잖아요. 다른 과목을 아무리 못해도 점수를 조금씩은 받을 수 있었기에 입학이 가능했습니다..

영재들이 모인다는 제1중에 입학한 뒤 북한 대표로 국제올림피아드 대회에 참가하고 메달을 따면서 정호 씨는 자신의 의지와 다른 삶을 살 수 있겠다는 불안감이 생겼습니다. 정호 씨에겐 어떤 사연이 있었을까요?

(이정호)올림피아드 학생이 선수생활을 끝내고 대학교에 진학할 때 거의 8-90%가 김일성종합대학 수학과에 진학을 해요. 그런데 북한에서는 (각 분야에서) 인재들을 많이 스카우트하려고 하거든요. 그 명단 중에 제가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선발이 되면 개인으로서의 삶이 거의 무너져요. 나 스스로 선택한 결정이면 모르겠는데 강제로 끌려가거나 나의 선택권이 없이 결정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많은 고민 끝에 한국까지, 여기까지 오게 됐습니다.

자세히 밝힐 수는 없지만 미사일 개발 등 관련 부문에 정호 씨의 이름이 올라갔다는 소식을 들었고 이 소식이 정호 씨를 한국까지 오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오히려 북한에서는 그런 분야의 과학자들이 대우받는다는데… 정호 씨는 왜 싫었을까요?

(이정호)예를 들어서 동물원에 있는 사자랑 아프리카 초원에 있는 사자를 비교해 보겠습니다. 동물원의 사자는 맨날 고기를 먹고 먹는 것을 충분히 먹고 사는데 동물원에 갇혀 살아요. 하지만 아프리카의 초원에 있는 사자는 생존을 위해 자기가 모든 것을 선택하는 거죠. 누가 더 행복한지, 사자한테 물어볼 수는 없지만 제가 볼 때는 아프리카 사자가 더 행복할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아프리카 사자의 삶을 선택한 거예요.

-Closing Music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 OSt 중 ‘하나의 답’) -

가만히 있어도 최상의 고기를 제공받는 동물원의 사자가 아니라 생존을 위해 스스로 사냥에 나서야 하는 초원의 사자를 선택한 정호 씨는 지금… 자신의 선택에 만족하며 살고 있을까요? 정호 씨는 스스로의 삶을 수학 문제처럼 하나하나 풀어가는데요. 마치 정호 씨의 이야기를 담은 듯한 영화가 최근 남한에서 개봉했습니다. 탈북한 수학천재가가 주인공인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라는 영화인데요. 정호 씨는 이 영화를 어떻게 봤을까요? 영화 이야기와 이정호 씨의 못다한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이어집니다. 영화 주제곡 ‘하나의 답’이라는 노래 들려드리면서 인사드립니다.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

기자 김인선, 에디터 이현주,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