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 변화로 죽을 맛인 남북의 기자들

취재진 붐비는 남북정상회담 프레스 센터
취재진 붐비는 남북정상회담 프레스 센터 (사진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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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북녘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요즘 저는 정신적, 육체적으로 참 힘듭니다. 제가 기자 경력이 16년차인데, 돌아보면 지금만큼 힘든 적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래도 예전엔 젊기라도 했지, 지금은 40대 중반으로 육박하는 나이라 똑같은 일도 힘들죠.

힘든 이유는 요즘 한반도 정세가 너무 변화무쌍하게 바뀌고 있기 때문입니다. 1월 김정은 신년사를 시작으로 12일 북미 정상회담까지 숨 가쁘게 달려온 지난 기간, 저 역시도 숨이 가빴습니다. 저는 북한을 전문으로 담당하는 기자인데다, 지금 소속이 국제부라 남북회담, 북미회담, 북중회담 할 것 없이 모두 제 담당입니다. 작년까진 정치부에서 통일부를 출입하며 한때 외교안보팀장을 했었고, 지금은 국제부 수석기자로, 한반도 특별취재팀 팀장을 맡고 여러 모로 책임까지 걸머져야 합니다.

그래서인지 밤 10시만 되면 오늘 트럼프가 또 뭐라고 할까, 저도 모르게 긴장되는 것이 습관이 됐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아침에 일어나면 꼭 전 세계 사람들이 보는 인터넷 공간에 몇 개 문장을 쓰는데, 이게 저를 고생 많이 시켰습니다. 신문 다 만들고 퇴근할까 했는데, 갑자기 하루 종일 써놓았던 기사를 모두 버리고 새로 써야 했던 날도 몇 번이나 됐습니다. 그것도 새벽에 각 가정에 신문을 배달해야 하니, 한 시간 남짓 기간에 절정의 집중을 해서 엄청나게 많은 기사를 써야 합니다.

가령 지난달 말 트럼프가 북미 회담을 취소한다고 한 날에도, 저녁 늦게까지 정상회담 장소 어딜까, 북미 간에 무슨 문제 논의할까 이렇게 써서 1면부터 쭉 신문을 찍으려 했는데 갑자기 취소한다 이럽니다. 난리가 난거죠. 트럼프는 딱 한 마디, 안 한다 이러면 끝인데, 신문은 10개면 가까이 비우고 다시 써야 합니다. 안한다고 하더라, 어디서 삐졌을까, 진짜 안할까, 기회는 없을까, 다시 하게 할 수 없을까, 이제 김정은은 어떻게 나올까, 한국, 중국 일본은 무슨 생각일까 이러루한 것을 한껏 상상력을 발휘해 씁니다.

그리고 다음날에 또 안한다고 하니 북한은 어떻게 나오더라, 미국은 앞으로 제재 강화할 것인가, 폼페이오가 평양갈까 이러면서 기사 썼는데 밤 10시쯤에 트럼프가 또 할 수도 있다 이렇게 말합니다. 다시 썼던 기사 다 빼고, 단 1시간 남짓한 기간에 기사들 다 새로 써서 갈아 끼웁니다. 물론 이거 저 혼자서 하는 것은 아니지만, 한반도를 담당한 숱한 기자들이 비상이 걸립니다.

이거 집중해서 막 쓰고 나서 기사 넘기면 마약에서 풀려난 사람처럼 다음날까지 멍해집니다. 그래서인지 6개월 만에 저는 그만 불면증이 생겼습니다. 집에 들어가도 잠이 안 와서 잠 설치고, 아침부터 하루 종일 멍하고 그럽니다.

지난주에도 12일 북미 정상회담, 13일 한국 지방선거, 14일 월드컵 시작과 같은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이어졌습니다. 이번 주도 김정은의 방중으로 또 비상이 걸렸죠. 이 고생하면서도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16년 동안 각종 속보 처리에 단련된 나도 이럴진데 요즘 북한 기자들은 아주 죽을 맛이겠다고 말입니다.

사실 지금까지 제가 언론인의 시각으로 북한 매체를 보면 기자가 정말 저렇게 편할 수가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노동신문은 고작 여섯 개 면인데, 기자는 거의 500명이 되지 않습니까. 1년에 기사 한 두개만 쓰는 기자도 적지 않습니다. 제가 일하는 동아일보는 남쪽에서 가장 규모가 큰 신문사로 꼽히고, 기자 숫자도 가장 많은 편인데도, 40 몇 개 면을 매일 발행하는데 기자는 200명 남짓입니다. 그러니 노동신문 기자가 얼마나 편하겠습니까.

기사도 오랫동안 철저히 준비해 낼 여유가 있고, 제일 중요하게는 지금까지 긴급하게 뭘 보도해야 할 일이 별로 없었습니다. 김정은 현지지도 보도도 딱 고정된 기사 쓰는 틀이 있어서 한 1년 전 기사를 가져다 장소와 시간, 말만 적당히 바꿔 쓰면 됩니다.

그런데 요즘은 어떻습니까. 저번에 김정은이 싱가포르에 가서 야간 관광을 갔던 소식이 다음날 1면 노동신문에 실렸더군요. 밤 11시 넘게 까지 돌아봤는데, 그걸 편집해 신문에 내려고 하면 노동신문 기자들도 밤에 비상이었을 겁니다. 북미 정상회담이 진행되는 내내 매일 아침에 속보가 실렸습니다. 여러분들이 잘 알겠지만, 노동신문이 이렇게 신속했던 적이 과거에 있었습니까?

어디 그뿐입니까? 처음 겪는 일들이니 과거를 참고해 쓸 수 있는 기사 틀도 없습니다. 거기에 이거 또 까딱 잘못 나가 김정은이 화를 내면, 거긴 엄청난 정치적 책임까지 져야 합니다. 아마 노동신문 담당 기자들, 특히 간부들은 지금쯤 저처럼 불면증에 걸리지 않았을까요? 신문만 그런 게 아니고, 조선중앙방송, 조선중앙통신 모두 그렇습니다. 한국에서 정말 고생이 많은 제가 다 동정을 할 정도로 열심히 일하는 것 같습니다.

덕분에 북한 인민은 눈이 동그래질 정도로 생생한 소식을 아침 신문에서 볼 수 있게 됐습니다. 진짜 노동신문이 구문이나, 소설집이 아닌 신문다워진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지금 북한에서 노동신문 인기나 신뢰도가 크게 높아졌다고 들었습니다. 과거엔 봐도, 안 봐도 그만이었지만, 요즘은 어제 저녁 일이 다 신문에 실리고, 덤으로 외국의 발전상도 과감 없이 보게 됩니다. 노동신문을 손전화로 구독하는 유료 홈페이지도 크게 인기라고 들었습니다.

이렇게 기자들이 죽어나는 대가로 남북의 인민은 아침마다 매일 놀라운 이야기들을 접하고 있습니다. 이런 변화무쌍한 정세의 흐름이 언제까지 이어질까요? 올해 말까지 계속 놀라운 일들이 벌어져 북한은 비핵화하고, 북미 수교도 하고, 한국 기업들이 북에 대거 올라갔으면 좋겠습니다. 문제는 그때까지 제 육체가 버텨낼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하지만 매일 죽어나면서도, 한편으론 이 변화에 행복하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서울에서 주성하였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