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북녘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2월 16일은 김정일의 생일입니다. 제가 어렸을 땐 이날에 김정일 대형 초상화 앞에 꽃을 갖다 바치라고 했죠. 강제는 아니었지만, 그런 행위가 충성심을 보여주는 행위라고 선생들이 은근히 부추겼습니다.
하지만 한 겨울에 꽃이 어디 있겠습니까. 집안 형편이 좋은 아이들은 집에서 김정일화를 키우기도 했지만, 김정일화 씨앗을 구할 경제력이 없으면 산에 올라가 눈 속에서 진달래를 꺾어와 2월 16일에 맞춰 꽃을 피웠습니다. 물론 저는 학교에서 공부를 잘해서 굳이 꽃을 바치지 않아도 선생님들이 좋아하니 한 번도 꽃을 가져간 적은 없습니다.
김정일 사망 후 그의 생일은 광명성절이라 불렸습니다. 이름 그대로 풀이하면 밝은 빛을 내는 별이란 뜻이겠지만, 하늘엔 광명성이란 별은 없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김정일의 출생이 밝음이 아닌 암흑의 시작이라고 할 수가 있죠.
김정일은 태어난 시기와 고향부터 거짓입니다. 하도 북한에서 ‘백두혈통’이라 떠드니 오늘은 김정일 출생의 비밀을 한번 이야기해 보려 합니다.
김일성과 김정숙이 일본군의 토벌에 쫓겨 10여 명의 소수 인원으로 소만(소련-만주) 국경을 넘은 날짜는 1940년 10월 23일입니다. 이는 소련의 기록에 다 남아있습니다. 국경을 넘은 이들은 소련 국경수비대에 체포돼 얼마간 감옥에 있다가 1941년 1월 초부터 우수리스크 인근 라즈돌노예 마을에 머물렀습니다. 이곳은 ‘남야영’이라고 불리는 곳으로 우수리스크에서 30㎞가량 남쪽에 있습니다.
김정일은 1941년 2월 16일, 이곳에서 태어났다는 것이 가장 신빙성이 있는 정설입니다.
지금 러시아의 라즈돌노예 기차역에서 약 800m 떨어진 곳에 김정일 생가도 보존돼 있습니다. 이 집은 1912년에 건설된 2층짜리 빨간 벽돌집인데, 2층 맨 왼쪽 방이 김정일이 태어난 곳입니다. 이곳에서 김정일을 받아낸 조산원은 간호 양성학교를 막 졸업한 17살의 엘냐라는 여성입니다. 1993년에 남한의 안기부에서 러시아에 들어가 엘냐의 증언을 기록했습니다.
엘냐는 조산원 면허 취득 후 3번째 받는 아기가 동양인이라서 기억이 또렷했는데, 그는 자신이 조산원 경험이 부족해 아기 탯줄을 길게 잘랐는데 3년 후 하바롭스크에서 배꼽이 툭 튀어나온 김정일을 만났다고 했습니다. 1년 뒤 김일성은 북야영으로 옮겨 이곳에서 둘째 아들 슈라를 낳았고, 해방이 돼 북한으로 돌아와 김경희를 낳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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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김정일의 이름은 러시아식으로 유라라고 불렀는데 1960년에 김정일이 김일성대에 입학하기 전까진 유라라는 이름을 썼습니다. 그런데 김정일의 출생 연도가 1941년이라고 확실하게 말하기 어려운 것은 김정숙과 함께 빨치산에서 활동했던 김선의 증언 때문입니다.
김선은 해방 후에 쭉 중국에서 살았는데 죽기 전에 김찬정이란 재일 한국인 작가를 만나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남야영에 여성 대원이 모두 9명이었고 모두 기혼자였는데, 그중 한 명을 빼고는 야영지 밖으로 나간 적은 없다. 남야영에서 9명의 여성 가운데 나와 김정숙 등 4명이 아이를 낳았다. 나는 1941년 12월에 출산했고, 김정숙은 1942년 2월에 출산했다.”
이렇게 밝혔는데, 다른 인터뷰에선 김정숙이 당시 여자아이를 낳았는데 일찍 죽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김선의 증언에 따르면 김정숙은 1941년과 1942년에 잇따라 출산했는데, 이중 딸이 하나 있었지만 젖먹이일 때 죽었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빨치산 여대원들의 인터뷰는 그들이 나이 70을 넘겨 기억이 가물가물할 때 한 것이라 20대를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참작해야 합니다.
북한이 1974년에 김정일 출생 33주년을 맞아 축하 전보문 발송 운동을 했던 기록도 있고, 1981년에 북한에서 ‘지도자 동지의 40회 생일을 축하한다’고 발표했으며, 1980년에 출판된 중국의 당대 국제인물 사전에도 김정일의 출생 연도가 1941년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이를 감안하면 김정일은 1941년생인데, 1982년경부터 아버지와 정주년을 맞추겠다고 생일을 1942년으로 조작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김정일이 백두산에서 태어났다는 것도 완전한 거짓말이죠.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8권에는 김일성과 김정숙이 찍은 사진이 나옵니다. 그 옆에 김일성이 자필로 ‘타향에서 봄을 맞으면서. 1941년 3월 1일 B 야영에서’라고 적혀있습니다. 백두산에서 아이를 낳고 보름 만에 러시아에 들어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또 김정일이 1942년생이라고 해도 그 시기, 김일성은 러시아를 뜬 적이 없는데, 아이를 낳으라고 아내만 위험한 백두산에 내보낼 남편이 어디 있겠습니까.
또 정말 김정일의 고향집이 백두산에 있다고 하면, 김일성이 왜 갑자기 죽기 전에야 비로써 아들의 고향이 백두산이고 태어난 집이 그곳에 있다고 했겠습니까. 이미 오래전에 이를 언급했을 것이고 태어난 집도 일찍 찾았겠죠. 김일성도 백두혈통을 위해 아들과 함께 조작에 가담해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북한은 2012년부터 김정일의 생일을 ‘광명성절’이라고 해오다가 올해부터는 광명성절이란 말을 쓰지 않고 있습니다. 작년에 태양절이란 말을 없애더니 올해는 광명성절도 없애고 있습니다. 김정은은 자기를 우상화하는데 이런 것이 소용이 없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할아버지, 아버지가 좋은 말을 다 가져다 써버려서 김정은이 쓸 단어가 없는 것도 한 이유일 겁니다.
그런데 광명성이란 말은 참 언어도단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만약 김일성에게 아들이 없었다면 여러분들은 지금처럼 3대 세습 독재에 시달리지 않았을 겁니다. 또 김정일의 통치 기간에 북한은 광명이 아니라 더욱더 암흑에 빠져들었고, 지금의 북한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가 됐습니다.
이것이 가짜 태양과 가짜 광명성을 숭배한 것에 대노한 하늘의 저주는 아닐까요. 지금까지 서울에서 주성하였습니다.
** 이 칼럼 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
에디터 양성원, 웹편집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