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십 년 반복돼 온 대국민 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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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북녘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이 없다는 말 이번 8차 당대회를 통해 다시금 느끼게 됩니다. 그런 회의 한번 하느라고 ‘80일 전투’니 뭐니 내몰려 인민들이 푸닥거리를 하게 한 것을 생각하면 제가 북한에 살지 않는데도 열 받습니다.

이번 회의에서 김정은은 “지난 5개년 계획의 경제 목표에 엄청나게 미달됐다”고 자인하고 또 “인민생활에서 폐부로 느낄 수 있는 실질적인 변화를 가져오기 위한 해결방책들”을 제시했다고 합니다. 또 헛소리인거 제가 굳이 말 안 해도 잘 아시겠죠.

아마 그 회의장에 참가한 당대표란 사람들도 그 긴 헛소리를 들어주느라 고생이 많을 겁니다. 저는 헛소리를 1시간도 들어줄 만큼 참을성도 없는데, 아마 그 회의장에 있었다면 졸았다고 총살될지 모르겠습니다.

김정은이 핵무기를 계속 부여잡고 있는 한 인민생활은 절대 나아질 수가 없습니다. 아니, 3대 세습 독재를 유지하는데 가장 큰 관심을 두고 있는 김정은이 통치를 하는 한 북한 경제는 절대 소생할 수 없습니다. 5년 뒤에 열릴 당대회는 더 열악한 환경에서 치르게 될 것이라고 예상합니다.

그렇게 김정은은 더는 통하지 않을 수십 년 반복되는 대국민 사기극을 계속 뻔뻔스럽게 하지만, 막상 북한 인민은 어떠한 대항도 하지 못하고 노예의 삶을 계속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유는 북한 체제를 지탱하는 양대축인 세뇌와 유례를 찾기 힘든 연좌제에 기초한 처벌 때문입니다. 삼엄한 감시를 통해 불만을 가진 자들을 색출해내고, 체제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있으면 당사자는 죽이고 가족들을 정치범수용소에 끌고 가니 사람들은 감히 저항할 생각을 못합니다.

그런데 북한 역사에서 폭동이 일어났던 단 하나의 예외가 있었습니다. 그것도 가장 가혹한 처벌과 감시가 일상화된 관리소에서 수감자들이 30~40명의 보위원들을 죽이고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저는 8차 당대회를 맞아 핍박받던 정치범들이 어떻게 목숨을 던지면서 저항했는지 그 역사를 오늘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폭동은 34년 전인 1987년 5월에 당시 온성군 창평에 위치해 있던 12호 관리소에서 일어났습니다. 북한 관리소 안에는 탄광과 농산반 등이 있는데, 폭동이 있어난 곳은 약 500여명이 일하는 탄광이었습니다. 정치범 중에서 힘을 쓰는 40대 미만이 주로 탄광에서 일하고 노약자는 농장에서 일하는데, 정치범들은 결혼을 거의 못하니 단체로 돼지우리 같은 곳에서 살며 노역에 동원됩니다.

이곳에서 경비병으로 있었던 출신이 탈북해 한국에 와서 제게 이야기해주었는데, 그는 1987년 8월에 이 부대에 신병으로 갔을 때까지 시신을 소각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고 증언했습니다. 또 분대장 등 고참 대원들이 불과 3개월 전에 일어난 폭동에 대해 자세히 말해주었다고 합니다.

폭동의 계기는 탄광에서 일하던 한 정치범이 보위원으로부터 심하게 구타를 당하다가 반항해 그를 때려눕히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자 보위원이 총을 꺼내 그 정치범을 현장에서 사살했고, 주변에서 이를 목격하고 분노한 다른 사람들이 다시 달라붙어 보위원들을 죽인 사건입니다.

현장에서 보위원을 때려죽인 이상 이들을 살려두겠습니까. 흥분한 정치범들은 “어차피 죽을 것이니 복수라도 하고 죽자”며 고개 하나 넘어 있는 보위원 사택마을을 들이쳤습니다. 그리고 닥치는 대로 죽였습니다.

뒤늦게 경비대가 출동해 정치범들을 사살하기 시작했습니다. AK47 소총의 탄약이 바닥이 나서 대공진지를 지키던 14.5mm 고사기관총을 가져다 사격했는데, 골짜기에선 하루 종일 총성이 울렸다고 합니다.

이 폭동으로 탄광에서 일하던 정치범 500여명이 학살됐습니다. 그리고 보위원 가족 마을에선 노인과 아녀자들을 포함해 200여명이 정치범들에게 죽었습니다. 이중 죽은 보위원 숫자는 30~40명 정도인데, 이들은 정치범수용소 울타리 밖에 공동묘지를 만들어 묻었습니다.

폭동으로 창평 관리소는 얼마 뒤 폐쇄돼 이곳에 남은 몇 만 명의 정치범들은 다른 관리소로 분산 수감됐고, 그 자리는 4.25담배농장이 들어서서 군인들 집단 제대시켜 일하게 했습니다.

저는 정치범들이 왜 탈출하지 못하고 수용소 울타리 안에서 참혹한 죽음을 맞았는지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온성군 남양 인근의 창평은 산을 타고 한 시간만 가도 두만강이 나오고 중국에 바로 갈 수 있는데다 당시엔 국경경비대도 거의 없었습니다.

당시엔 중국도 주민 파악 시스템이 허술해서, 더러는 체포돼 북송되겠지만 그래도 일부는 숨어살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탈출하지 못한 이유는 그들이 지리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하루아침에 체포해 밖이 보이지 않는 호송차에 실려 수용소에 들어오다 보니 자기들이 두만강 옆에 있는지, 아님 강원도 산골에 있는지 전혀 몰랐고, 그러니 방향을 잡을 수 없어 탈출하지 못한 것입니다.

지금은 두만강 옆 정치범수용소에서 이런 폭동이 일어나면 사람들이 중국으로 탈출할 것입니다. 최근 20년 안에 끌려간 사람들은 대량탈북 시대를 거치며 중국으로 탈북할 수 있고, 한국도 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북한은 12호 수용소는 물론 두만강 옆 회령 22호 정치범수용소도 없애고, 정치범수용소들을 내륙으로 모두 통폐합시켜 5개만 남겨두었습니다. 여전히 20만 명으로 추산되는 정치범들이 짐승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창평 12호 관리소의 폭동은 인간은 마냥 밟혀만 살 수 없다는 교훈을 남겨주었습니다. 어제는 관리소의 정치범들이 이렇게 죽으나 저렇게 죽으나 참을 수 없어 일어났지만, 북한 전체가 나치의 수용소처럼 변한 지금은 어느 곳에서 인민들이 일어나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거기에 군인들까지 합세한다면 지금은 마냥 굳건해 보이는 김정은 체제도 더는 배겨내지 못할 것입니다. 인민의 분노를 두려워하지 않는 김정은에게 그런 역사의 교훈을 꼭 보여주고 싶습니다. 지금까지 서울에서 주성하였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