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북녘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번에 말씀드린 것처럼 오늘부터 김일성의 역사가 어떻게 조작됐는지를 여러분들께 들려드리려 합니다. 오늘은 김일성의 출생비밀 편입니다. 여러분들이 아시는 것처럼 김일성은 1912년 4월 15일, 20세 강반석과 18세 김형직의 맏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김형직과 강반석의 중매자는 뜻밖에도 미국 선교사 넬슨 벨입니다.
김형직은 어려서부터 미국 선교사들이 지은 평양순화학교를 다니며 목사의 꿈을 키웠고, 붓글로 한글 성경을 옮겨 적던 아이었습니다. 당시 미국 선교사들은 교회에 잘 나오는 학생에게 돈 1전씩 주었는데 김형직은 그 돈을 고스란히 교회 헌금통 안에 집어넣는 정직한 신앙심을 보여 미국 선교사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미국 선교사들의 추천으로 김형직은 숭실학교에도 입학했습니다. 이 숭실학교가 1897년 미국 북장로교 베어드 선교사에 의해 당시 평양 신양리 26번지에 세워졌다는 사실은 북에선 절대 배워주지 않는 진실입니다.
독실한 기독교 장로 강돈욱의 둘째 딸로 태어난 강반석은 본명이 강신희였습니다. 하지만 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이름을 반석으로 지었는데, 이렇게 이름을 바꿔준 사람도 미국 선교사 넬슨 벨입니다. 반석이란 이름은 예수의 12명 제자 중 한 명인 베드로를 우리말로 번역한 이름입니다.
김형직과 강반석을 중매서준 넬슨 벨 센교사의 사위가 바로 미국 침례교의 빌리 그레이엄 목사입니다. 기억하시는 분들도 많겠지만 빌리 그레이엄 목사는 1992년과 1994년 평양을 두 번이나 방문해 김일성을 만났고 김일성대에서도 강연했습니다. 저도 그때 북한에서 '왜 미국 기독교 목사를 초청해 부르지?' 하고 의문을 가졌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바로 김일성에겐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장인은 자기 부모를 세례했고, 이름까지 고쳐주었던 그런 은인이라는 인연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반갑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미국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개명하고, 하나님을 열심히 믿었던 집안에서 지금은 하나님이란 말만 나와도 처형시키는 악독한 김 씨 독재 일가가 탄생했단 것은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죠. 북한은 김형직이 조선국민회를 무어서 일제와 투쟁했다고 선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도 알고 보면 김형직이 직접 무은 단체가 아닙니다.
한국의 초기 독립사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이승만과 박용만이라는 두 명의 유명한 지도자가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하와이에서 함께 지내며 한때 결의형제까지 맺을 정도로 친했지만 나중에 독립 방법에 대한 노선을 달리 하면서 결별합니다. 미국에서 기독교 신자가 된 이승만은 직접 총을 들고 싸우는 방식에 거부감을 표시한 반면 박용만은 직접 무장을 들고 일제에게 투쟁해야 한다는 무장투쟁의 신봉자였습니다.
그런데 1914년 숭실학교 졸업생 중 한 명인 장일환이란 사람이 미국 하와이에 건너가 박용만을 만나고 돌아와 그의 사상에 심취됐습니다. 그리고 돌아와 숭실학교 친한 후배들을 끌어들여 평양 조선국민회를 만났습니다.
이때쯤에 박용만은 하와이 교민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아 대조선국민군단을 만들었고, 산하에 사관학교까지 둘 정도로 영향력을 넓히고 있었는데 평양의 조선국민회는 이 대조선국민군단의 국내 지부였습니다. 조선국민회는 장일환이 대장이고, 김형직과 또 김형직의 1년 후배인 배민수란 사람 3명이 주도했습니다.
배민수는 충북 청주에서 활동하다가 체포돼 총살된 의병대장 배창근의 외아들로 반일사상이 강했고, 일제에게 체포돼 여러 번 감옥생활을 하다가 나중에 미국에 건너가 목사가 된 뒤 해방 후 미국 통역관이 돼 돌아왔습니다. 한국 정부에서 아버지 배창근과 함께 나중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받은 독립투사이기도 합니다. 장일환과 배창근 김형직은 평양에 있는 기자묘에 올라가 함께 눈물로 기도를 하면서 독립을 위해 싸우자고 결의했습니다.
그런데 1918년 2월 18일 조선국민회가 발각돼 모두 감옥에 갑니다. 당시 일제의 감옥은 북한 보위부 감옥처럼 악독했던 곳이라 고문 받던 중 지도자인 장일환은 체포 두 달만에 옥사했고, 10개월 옥고를 치른 김형직은 반죽음이 돼 겨우 살아나왔습니다. 집에서 몸조리를 하던 김형직은 일제 순사들의 감시를 피해 압록강 쪽으로 혼자 조용히 도망쳐 갑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친구인 오동진의 집에 숨어살면서 의종금감, 본초강목이란 고전의학서를 읽고 나중에 한의사로 행세하면서 활동합니다.
그런데 기독교인인 김형직은 공산주의자들을 너무 싫어해서 치료까지 거부했고, 나중에 공산주의자들에게 매를 맞은 적도 있습니다. 그런 김형직의 아들이 공산주의를 핑계로 나중에 민족주의자들을 다 죽인 것도 참 기가 막힌 일입니다. 기독교에서 최고 배신자를 '유다같은 자'라고 하는데, 김일성이야 말로 아버지 김형직과 강반석에겐 유다같은 자식인 것입니다. 아무튼 김형직은 민족주의 계열에서 항일투쟁을 계속하다가 고문으로 얻은 후유증으로 1926년 사망합니다.
김형직의 동생이자 김일성의 삼촌인 김형권도 1930년 8월 14일 조선국민부의 군자금 공작차 풍산에 왔다가 일제 순사 오빠시를 쏴죽이고 체포됐다고 여러분들은 배웁니다. 하지만 김형권은 최효일이란 사람의 부하로 박차석과 함께 국내에 왔고 오빠시를 쏴죽인 사람도 최효일입니다. 나중에 최효일은 체포돼 사형 당했는데 영화 '누리에 붙는 불'에선 김형권을 대장으로 만들어놨습니다. 김형권은 당시 도망치다가 군자금으로 19원을 빼앗은 강도죄로 징역 15년형에 처해졌다가 1936년 마포형무소에서 옥사합니다.
김일성의 아버지와 삼촌은 지도자가 아닌 누구의 부하로 활동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항일활동을 했던 것은 맞으니 이런 역사를 솔직하게 배워줘도 되는데 북한은 왜 역사조작을 그렇게 해대는지 모르겠습니다. 다음시간엔 김성주가 어떻게 김일성이 됐는지, 진짜 김일성은 누구였는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까지 서울에서 주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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