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북녘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김일성 회고록이 말해주지 않는 김일성 항일혁명의 진실 여덟 번째 시간입니다. 당초 한 10회 정도로 말씀드리려 했으니 앞으로 2회 정도 더 하면 됩니다.
오늘은 김일성 회고록에 등장하는 전광이란 인물의 이야기를 들려드릴까 합니다. 항일투쟁사에 유명한 책인 '아리랑의 노래' 주인공인 김산이 가장 존경했던 인물이 바로 전광입니다. 김일성은 회고록에서 전광의 투항소식에 모두가 충격을 받았다고 짤막하게 적고 있습니다. 또 하나, 김일성이 만들었다는 조국광복회 발기인 명단을 보면 김일성을 제치고 오성륜이란 인물이 가장 먼저 올라있습니다.
그런데 김일성은 조국광복회를 만든 오성륜이 바로 투항한 전광이란 사실을 숨깁니다. 조국광복회의 정식 명칭은 '재만한인조국광복회'였는데 만들 때 남만 항일연군 조선인 간부 중에 가장 명망 있는 혁명가인 오성륜, 즉 전광이 당연히 먼저 이름을 올렸죠. 이때 김일성은 동북항일연군 3사 사장이었습니다. 김일성이 지휘했다고 하는 간삼봉 전투를 지휘한 것도 전광입니다.
말 나온 김에 간삼봉 전투의 진실도 말씀드리면, 북한은 이를 일본군 74연대 2천명 중 1천5백명을 죽여 '호박대가리' 전설이 나오게 된 전투라 선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론 일본군이 150명 정도에 동북항일연군 3개사 500명 정도가 붙은 전투로 실제 일본군 전사자는 50~60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다시 전광의 이야기로 돌아가면 그가 1922년 3월 28일 상해에서 일본군 대장 다나카 기이치를 저격하려다 실패한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습니다. 다나카는 몇 년 뒤 일본 총리까지 지낸 중국 침략의 수괴였는데 전광은 다나카가 황포강을 건너 배에서 내리는 순간 저격했습니다. 성공했으면 안중근과 비교되는 민족의 영웅이 될 수 있었는데, 그만 총을 쏘는 그 순간 배에서 내리던 영국 여자가 다나카 앞을 가려서 대신 맞았습니다. 전광은 탈출하다 일본군에 체포됐는데 대단하게도 감옥을 부수고 탈출했습니다. 이때 전광의 머리에 5만 달러의 현상금이 걸렸습니다. 일본이 이 정도 현상금을 건 인물은 해방 전에 김구와 전광밖에 없습니다. 전광이 일본군 대장을 암살하려할 때 김성주는 10살 밖에 안됐습니다. 전광은 그 전에는 폭탄을 만들어 국내로 반입시켜 수많은 의거를 지도했습니다.
감옥에서 탈출한 전광은 얼마 뒤 독일 베를린에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1년쯤 살다가 다시 모스크바로 건너갔고 또 중국으로 돌아와 1926년 황포군관학교 교관이 됐습니다. 조선 혁명가 중엔 전광처럼 상하이, 광저우, 프랑스, 독일, 모스크바 등 전 세계를 자기 마당처럼 활보한 신출귀몰의 인물이 없습니다. 황포군관학교 교관 시절에 여러분들도 다 아는 최용건, 나중에 만주에서 김일성 장군이라고 불렸던 양림 등을 가르쳤습니다.
전광은 1927년 11월 중국 역사에서 유명한 광주 무장봉기에 지휘관으로 참가했습니다. 이 봉기 때 최용건 등 황포군관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던 150명의 조선청년들도 참가했다가 대다수가 전사했습니다. 다 살아있었으면 나중에 최용건처럼 걸출한 동북의 항일 영웅들이 될 수 있었던 사람들인데 정말 애석한 일이죠.
광주봉기가 실패하고 도시를 빠져나온 봉기 부대는 홍군 제4사단으로 개편됐는데 전광이 사단 참모장이 됩니다. 그가 한족이었다면 사단장을 했겠죠. 김일성이 16살이던 1928년 전광은 중국 8대 원수 중 하나인 하룡과 함께 홍군을 지휘하며 해륙풍 근거지 방어전투를 치렀습니다. 그런데 이 전투 역시 중과부적이어서 후퇴해야 했죠.
1929년 전광은 만주로 왔습니다. 이미 홍군 사단을 지휘했던 전광은 조선인 혁명가 중 가장 유명한 인물이 돼 있었고, 그는 만주에서 수많은 혁명가를 키워냈고, 유격부대를 만들어냈습니다.
1937년 전광은 어느덧 40살이 됐습니다. 유격대 지휘관치고는 노인 취급 받을 정도로 나이도 많고 악성 심장비대증까지 앓다보니 그는 1선에서 부대를 이끌지 못하고 2군 정치부 주임, 1로군 총정치부 주임, 남만성위 선전부장 등을 맡았습니다. 하지만 동북 유격대에서 가장 유명한 군 장급 인물인 위증민, 양정우, 이동광 모두가 전광 앞에선 어려워했습니다. 전광은 직책에 상관없이 남만 항일연군 조선인 간부들 중에선 가장 경험이 풍부한 혁명의 대선배였고 그 앞에서 김일성은 머리를 들지도 못할 정도였죠.
그런데 1939년부터 집요해진 일본군 토벌로 항일연군이 엄청난 피해를 봅니다. 항일연군3만 명 중에 3000명 정도만 살아남고 양정우, 이동광, 위증민 등 쟁쟁한 간부들도 전사했죠. 바로 이 시기 김일성은 살아남은 부대원 17명인가를 데리고 지휘부에 보고도 없이 잽싸게 소련으로 도망갔던 것입니다.
전광은 소련에 가지 않고 버텼지만 어느 순간 갑자기 넋이 나갔는지 1941년 1월 30일 일제에게 투항했습니다. 누구보다 혁명적 열정이 높았고, 추진력이 강했던 전광이지만 20년 넘게 싸운 일제가 망하기는커녕 오히려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고 중국을 지배하는 등 승승장구하자, 또 자기의 건강이 더 버티지 못하자 갑자기 신심이 팍 꺾인 것 같습니다. 일제도 전광이 조선인 간부 중 가장 유명하다는 것을 아니까 막 대하진 않고 중국 열하성 경무청 경위보로 임명했습니다.
해방이 되자 전광은 팔로군에게 잡혔습니다. 그러나 하도 대단한 사람인지라 팔로군은 그를 죽이지 않고 철수할 때 데리고 갔는데 그만 곧 병에 걸려 죽었습니다. 전광이 비록 생애 마지막 순간 변절은 했지만 1930년대 항일운동사에선 김일성과 감히 비교할 수 없는 업적을 남겼죠. 김일성은 전광과 같은 수많은 혁명 선배들이 죽거나 체포되면서 운이 좋게 지도자로 발탁이 된 것이고 나중에 조국 광복회처럼 선배들이 만든 업적을 다 자기가 한 것처럼 둔갑시켰습니다. 지금까지 서울에서 주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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