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북녘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요즘에 북한에서 새 영화가 거의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김정일 시절에는 그래도 매년 10편 정도는 새 영화들이 나왔고, 그중에 잘 만들었다고 스스로 칭찬하는 영화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김정은의 치하를 받았다는 그런 영화도 보이지 않습니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졌는지 그 내막을 아는 탈북한 사람을 만났더니 “영화를 매년 몇 개씩 만들어 올리긴 하는데 김정은이 비준을 해주지 않아 이젠 새로 창작할 의욕도 잃은 상태”라고 하더군요.
북한은 영화를 사상적 세뇌의 중요한 수단으로 보기 때문에 김정일 때부터 그의 비준을 받아야 공개돼 왔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왜 영화가 승인되지 않고 있을까요. 대답은 간단합니다. 자기 보건대도 눈이 감기기 때문입니다.
돌아보면 김정은이 처음부터 영화에 무관심했던 것은 아닙니다. 2014년 11월 김정은이 ‘4.26만화영화촬영소’를 방문해 50부로 종영한 소년장수를 50부 더 늘여서 100부로 만들라고 지시한 것은 여러분들도 아실 겁니다.
조선중앙통신에 따르면, 그때 이런 말을 했답니다. “우리 만화영화는 독창성과 매력, 높은 형상 수준과 빠른 창작 속도로 하여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있다. 야심을 가지고 북한을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만화영화 대국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러면서 이날 “만화영화 창작에 관한 혁명적 전환을 가져오기 위한 강령적 지침을 지시했다”고 했답니다.
그런데 나중에 들어보니 이렇게 멋있는 말을 한 것은 아니죠. 늘 김 부자의 말씀이란 것은 선전선동부가 각색해 써주는 겁니다. 그날 김정은이 와서 칭찬도 좀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우리는 만화를 왜 이렇게 밖에 못 만드냐. 소년장수랑 역사 만화물은 더 잘 만들 수 있지 않겠냐. 내가 샘플 하나 보내줄테니 그걸 참고해서 만들어 봐라”고 했답니다.
그리고 다음날 만화촬영소에 CD 하나가 왔는데 바로 한국 역사물 만화영화였다고 합니다. 김정은이 보고 참고하라고 하니 제작자들이 다 봤답니다.
이건 뭘 말합니까. 김정은은 이미 한국 만화를 많이 봤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한국 만화를 보며 눈이 높아진 김정은이 볼 때는 자기들 만화가 성에 차지 않는 거죠. 남북관계가 좋을 때 북한 간부들이 한국 만화제작사에 이설주 배속에 있는 김정은의 아이를 위해 만화영화를 특별히 만들어달라는 황당한 부탁까지 한 적이 있습니다.
이런 김정은이 지난해 말 ‘반동문화사상배격법’이란 것을 만들어 한류를 접하면 최대 사형에 이르는 엄벌을 내리고 있습니다. 북한에서 반동문화를 가장 많이 접한 사람이 다름 아닌 김정은인데, 기가 막힌 일이죠.
아무튼 한국 만화까지 보내주며 독려하니 만화가들은 80일 전투니, 100일 전투니 하면서 뽕이 빠지게 만화들을 찍어냈습니다. 무려 몇 백개나 만들었는데, 이렇게 나온 만화가 소년장수 100부는 물론 ‘고주몽’과 ‘고구려의 젊은 무사들’ 등이 있습니다.
북한 사람들은 갑자기 고만고만한 역사 만화가 쏟아져 나오니 무슨 일인가 놀랐겠습니다. 물론 외국 만화를 보지 못한 북한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새로 나오는 만화가 입체감을 살리려 했기 때문에 좀 달라졌다고 보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저도 몇 편 봤는데, 제 눈에는 도토리 키 대보기였습니다. 애국주의라는 고리타분함에서 벗어나지 못한데다, 북한이라는 우물에 갇혀 있는 작가들의 상상력이 한계가 분명히 보였습니다.
그렇게라도 만화는 갑자기 엄청 만드는데 예술영화가 없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김정은이 승인해주지 않기 때문인데, 외국에 나가 할리우드 영화, 한국 영화 다 본 김정은이 봤을 때 북한 영화가 뭐가 재미있겠습니까. 천편일률적이죠. 그런데 작가들도 어쩔 수 없습니다. 조금만 잘못 썼다간 황색바람이 들었다고 숙청될 것이 분명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고 영화를 만들지 않으면 혁명과업 수행을 하지 않는다고 질책할 것이니 만드는 시늉은 내지만 자기들 볼 때도 재미없을 겁니다.
하지만 북한 영화계는 만화처럼 속도전으로 확 풀 수 있는 문제도 아닙니다. 영화를 찍으려면 돈이 많이 드는데, 상업영화가 없으니 제작비를 뽑을 방법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논다고 욕을 먹을 수는 없으니 제작자들이 궁여지책으로 생각한 것이 부자집 자식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것입니다. 유명 배우로 만들어주는 대신 각종 소품과 의상, 세트장 제작비용, 스탭들 식사까지 대는 조건이지요.
이런 환경이니 닭다리 뜯어먹는 장면이 하나라도 들어가면 모두가 긴장하고 감독이 “다시”하면 주인공 얼굴부터 험악하게 변한다고 합니다. 장마당에 가서 자기 돈으로 닭을 다시 사와야 하기 때문이죠. 이렇게 만든 영화에서 연기력은 기대하기 어렵고, 또 잘못하면 황색바람이 들었다고 몰려 죽을 수 있기 때문에 시나리오도 거의 변화가 없습니다. 그러니 김정은도 짜증나서 못 봐줄 영화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최근 몇 년 동안 북한 영화 제작자들은 과거 영화에서 숙청된 배우를 빼고 새 배우 넣어서 영화를 새로 만드는데 집중하는데, 장성택 조카사위인 최웅철이 나온 곡절많은 운명은 신통하게 고쳤더군요.
그런데 이것도 역부족인지 작년부터 숙청된 배우가 등장한 영화도 다시 상영하기 시작하더군요.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가다 자결한 박미향이 나온 ‘한 여학생의 일기’와 장성택의 여자로 숙청된 김혜경이 나온 영화도 나옵니다. 물론 마지막에 주인공 이름은 쏙 빼버렸더군요. 그렇긴 해도 숙청된 배우의 얼굴이 다시 등장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데, 그만큼 북한 영화판이 비정상이란 의미입니다. 그러나 정상으로 돌아갈 가능성은 해가 갈수록 점점 희박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혁명’이란 것을 시작할 때 예술선전부터 앞세웠는데, 망해갈 때엔 예술선전이 맨 먼저 죽어가니 참으로 의미심장한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지금까지 서울에서 주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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