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성하의 서울살이] 목숨 내걸지 않고 고향에 돌아갈 수 있는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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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북녘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번에 북에 가서 기자회견한 박정숙 할머니 이야기 하다가 방송 시간 모자라서 말았는데요. 오늘 계속하겠습니다.

사실 그 할머니의 경우 집안 내역을 보면 지주 집안이고 아버지도 해방 전 일본에서 의학 박사를 받고, 해방 뒤에는 청진의학대학 학장을 지낸 분입니다. 월남해서도 계속 의사만 하고 대학병원 원장도 했으니 돈 많이 벌어놓았죠. 그리고 박정숙 할머니의 첫째 오빠도 미국에서 교수를 했습니다.

그러니 이 할머니가 남쪽에 가면 큰 도움을 받을 거다 이런 생각을 하고 떠난 거죠. 그런데 와보니 아버지는 95세까지 정정해서 살다가 그만 이 할머니가 와서 20일 만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자기 딸이 56년 만에 온 사실도 모르고 말입니다. 알았으면 돈이라도 좀 물려줬겠는데 그냥 세상 떠나니 돈도 한 푼 상속 못 받았습니다.

할머니의 아버지가 월남 후 재혼해서 다시 4형제를 낳았는데요. 다 잘됐습니다. 특히 막내 아들, 그러니까 박정숙 할머니 배다른 동생은 국회의원, 북한으로 말하면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3번씩이나 했고요. 그런데 이 분들이 말이 형제지 사실 60년 넘게 얼굴도 모르고 살았는데 무슨 정이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할머니 기대처럼 그리 많이 도와준 것 같지도 않고, 미국에 있는 오빠조차 거의 도와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큰 돈 생길 줄 알고 잔뜩 기대를 품고 왔는데, 와보니 전혀 다른 겁니다. 거기다 아들은 또 추방돼 갔다고 하지. 할머니 혼자서 벌어먹고 살기는 힘들지. 그러니 내가 늙었는데 아들이라도 살리자 이러고 돌아간 겁니다. 마침 북에서 선전용으로 잘 써줬으니 망정이지, 그냥 "너 같은 배반자는 필요 없어"하고 죽여도 할 말은 없죠. 그러니 운이 좋았죠. 그걸 보고 여기 탈북 노인 중에는 부럽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저번에 말씀 드렸다시피 여기는 탈북 노인들의 경우엔 살기 어렵습니다. 여기는 굶어죽을 걱정은 없으니 행복하다고 느껴야 하지만, 안 그런 노인도 적지 않습니다. 이를테면 자식 중 한 명이 먼저 탈북해서 부모 모시고 온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부모들 사실 북에서 자식이 보내준 돈으로 잘 먹고 살았던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그냥 자식이 그리워 왔는데 와 보니 북에 두고 온 또 다른 자식이 그리운 겁니다.

또 나이 들면 말동무가 필요한데, 남쪽에 친구하나 있기를 하나, 말투도 다르고 살아온 환경도 완전히 다르고 하니 동네에서 휩쓸리기도 쉽지 않습니다. 여기는 돈만 있으면 해외여행도 마음껏 갈 수 있는데요. 탈북자가 여기 와서 무슨 돈이 그리 많겠습니까. 그러니 노인들은 그냥 하루 종일 집에서 애나 봐주고, 텔레비나 보고 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자식들은 경쟁 사회라 밖에 나가 열심히 돈을 버니까 혼자 하루 종일 집을 지키고 이러니 갑갑한 겁니다.

북에서 돈 좀 있다는 말을 들으면서 어깨 힘주고 다니고, 동네 마실 다니고 이럴 때가 그립다는 생각이 자연히 들죠. 그런데 정작 가면 또 탈북했고, 남쪽에도 자식 있고 이러니 처벌받을 것이 뻔해서 못가는 거죠. 물론 탈북 노인들이 다 이런 건 아닙니다. 온 집안이 왔으면 북에 왜 가고 싶겠습니까. 하지만 현실은 북에도 남에도 자식을 둔 노인이 많다는 거죠. 그런 분들이 느끼는 외로움과 허전함이 특히 큰 것 같습니다. 홀로 온 경우는 더 말할 것도 없죠. 평생 친숙했던 땅을 떠나 자식 친척 하나도 없고, 문화적 이질감도 큰 이 땅에서 외롭게 늙어가는 심정은 더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그런데 먹고 사는 것까진 국가에서 굶지 않게 보장해 줄 순 있어도, 이런 심리적 외로움까지 국가가 구제해 줄 수는 없습니다. 사람이라는 것이 뭘 하나 얻으면 또 다른 것이 욕심납니다. 먹고 사는 것이 문제없으면 이번엔 정서적 만족을 얻으려는 것이 인간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남쪽에서 이제 한 10년 살아본 입장에서 말씀드리면 노인 분들은 정말 탈북을 신중하게 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런 문제가 있으니 잘 따져보고 내가 한국에 가도 이겨낼 수 있다 이러면 괜찮습니다. 당장 굶어죽게 생겼다 이러면 당연히 한국에 와서도 잘 왔다 이렇게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한국에 가면 아주 행복할 것이란 생각은 품고 오지 마십시오. 외로울 때가 참 많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면 탈북하지 말라고 선전하는 것 같아서 마치 북한 정부 대변인인 것 같은 기분이 들긴 합니다만, 이건 대북 심리전 방송이 아닙니다. 그냥 저의 시각에서 보고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 하는 것이죠. 북한 당국의 이야기도 맞는 것은 맞고, 틀린 것은 틀리다고 눈치 보지 않고 말 할 자유가 제게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바로 자유 민주주의 세상인 겁니다.

대신 젊은 사람들의 경우, 특히 나이가 젊을수록 빨리 오면 좋습니다. 저도 20대에 한국에 왔는데, 지금 생각하면 정말 나이 어릴 때 온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릅니다. 인생을 쓸데없이 허비하지 않았으니 말입니다.

저는 이번 박정숙 할머니처럼 북한 당국이 자진해 돌아오는 탈북자는 다 처벌 없이 받아줬음 좋겠습니다. 여기 남쪽에 좋은 점이야 상당히 많지만 그렇다고 천국은 아니거든요. 여기 와보니 내겐 맞지 않는다 북에 다시 가겠다 이러고 다시 돌아가면 처벌도 받지 않는 사회, 얼마나 좋습니까. 유독 북한만 빼고 지금 전 세계는 다 그렇게 살고 있거든요.

그렇지만 지금 같아선 북한 보위부를 어떻게 믿습니까. 괜찮다 괜찮다 이래서 다 갔더니 어느 순간 다 잡아다 한꺼번에 관리소에 넣으면 끝이죠. 솔직히 여기서도 그렇지만, 북쪽 사람들도 다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신뢰라는 것이 중요한 겁니다. 북한이 자기 고향에 되돌아가고 싶어도 목숨 내걸고 가야 하는 그런 사회에서 하루 빨리 벗어나길 바라며 지금까지 서울에서 주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