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북녘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북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던 유명한 여성, 김정일을 ‘오라버니’라고 부른 간 큰 여성이었던 정춘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저도 북에 있을 때 정춘실이 티비에 나와서 우리 오라버니가 어쩌고저쩌고 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저 여자는 얼마나 대단하길래 감히 김정일을 오라버니라고 한단 말인가. 저러고도 살아있나”고 걱정했는데, 결국 그 오라버니란 말이 빌미가 돼서 고초를 겪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정춘실의 이후 운명에 대해 아는 사람은 북에도 많지 않습니다.
정춘실이 어떤 여성인지 젊은 세대는 모를 수도 있어 간단히 설명드리면, 자강도 진천군 상업관리소 소장을 40년 넘게 한 여성이죠. 북한에선 한때 ‘정춘실운동’이란 것도 벌어져 전국이 따라 배우라고 했고 정춘실은 김일성훈장 수상자, 2중 노력영웅,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등 각종 표창은 다 받았습니다.
정춘실이 뜬 것은 김일성이 1960년대 진천에 갔을 때 ‘우리 가정수첩’이라는 가구별 장부를 만들어 주민들의 일상사를 챙기는 여성 판매원을 만나면서였습니다. 김일성은 “우리 가정수첩 공산주의상업의 싹이며, 아주 좋은 사회주의 상품공급 방법”이라고 칭찬을 했습니다. 이후 정춘실은 상업분야의 선구자로 추앙을 받았죠.
1990년대 북한경제가 어려움을 겪자 김일성은 정춘실을 다시 등장시켰습니다. 국가가 줄 것이 없으니 아래 상업관리소 간부들이 해당 지역 주민들의 삶을 챙기라는 것인데 거기에 모범으로 내세운 것이 정춘실이었습니다. 정춘실운동은 “정춘실이처럼 하라. 나라에 손을 내밀지 말라” 이게 핵심이었죠.
북한은 ‘정춘실운동 모범단위’ 칭호를 제정했고, 정춘실을 주제로 "효녀"라는 예술영화를 만들어 실효모임도 했습니다. 정춘실이 티비에 나와 “우리 오라버니 심려를 덜어드리겠다”고 떠들었던 것이 이때였습니다. 정춘실이 1942년 12월생인데, 김정일과 동갑이지만 10개월 늦게 태어났다고 김정일을 오라버니라고 한 것입니다. 솔직히 김정일의 입장에선 저기 촌구석 일개 상업관리소 소장이 티비에 나와 신의 자리에 앉아있는 자기를 오라버니 어쩌고 하는 것이 기분이 좋았을 수는 없었을 겁니다. 그렇지만 1994년엔 정춘실을 키운 김일성이 살아있을 때이고, 또 전국에 정춘실을 따라 배우라고 해놓고 숙청할 수는 없으니 기분 나쁜 대로 봐줬을 겁니다.
김일성이 죽자마자 정춘실은 박살이 났죠. 바로 김정일의 누이동생 김경희한테 박살이 났습니다. 아마 정춘실에게 제일 기분 나쁜 또 다른 사람이 김경희가 아니었을까요. 북한에 김정일을 오빠라고 부를 사람은 자기 한 명이면 됐지, 촌 여자가 감히 어디다 대고 오빠라고 합니까. 그래서 정춘실 뒷조사를 했죠. 당시 북한은 고난의 행군 시절이라 굶어죽는 사람이 속출할 때였는데 당시 자강도 책임비서가 북한이 나름 충신이라고 꼽는 연형묵이었습니다.
연형묵은 책임비서가 모범을 보여야 한다며 꽃제비 몇 명을 자기 집에 데려와 돌보는 등 나름 간부의 모범적 자세를 보였습니다. 간부들도 그를 따라 몇 명씩 데려다 꽃제비를 돌봤지만, 식량이 모자라는데 굶어죽는 사람들 어떻게 살립니까. 그런데 자강도에서 식량을 가장 많이 갖고 있던 사람이 정춘실이었습니다. 상업관리소는 넓은 땅을 가지고 옥수수를 심어 오리, 해리서(뉴트리아) 등을 키웠고, 이것이 정춘실의 성과로 계속 보도가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연형묵이 정춘실에게 굶는 사람들 좀 주게 강냉이 좀 내놓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거절당했죠. 정춘실도 일정한 성과를 내야 계속 평가받을 수 있으니까 연형묵 책임비서에게 “나는 장군님 지시만 듣고, 장군님께 약속한 과제를 수행해야 한다” 이런 태도를 보였습니다. 아무리 도당 책임비서라고 해도 김정일을 오라버니라고 하는 여자를 마음대로 해임할 수도 추궁할 수도 없었습니다. 책임비서가 이럴 정도니 도 상업관리소 소장은 산하 군 상업관리소 소장인 정춘실에게 허리 굽혀 설설 길 정도였습니다. 사람들이 굶어죽는데 전천군 상업관리소 가축은 강냉이를 먹고 사니 그때 자강도에 “오리가 되고 싶어요”라는 말이 유명했습니다. “우리는 풀죽, 오리는 강냉이” 이러면서 정춘실을 비난하는 여론이 우세했습니다.
이럴 때 김경희가 나섰는데, 연형묵이 자기가 손을 댈 수가 없으니 김경희를 이용했는지, 아니면 김경희가 정춘실을 손봐주려고 책임비서에 대한 불경죄로 엮였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김정일이 뒤에서 “저 여자 좀 혼내주라” 했을 수도 있습니다.
결국 전천군 상업관리소에 중앙당 검열단이 들이닥쳤고, 정춘실은 “당의 신임을 믿고 기고만장해 도의 최고 간부인 도당책임비서의 말도 듣지 않고, 사람들이 굶어죽는데 자기 명예를 위해 오리에게 강냉이를 주어 당과 대중을 이간시켰고” 등의 이유로 해임됐습니다. 그래도 김일성이 그렇게 띄워주고, 김정일도 그렇게 칭찬한 여자가 반동이 된다는 것은 어딜 봐도 여론이 안 좋아질 것 같으니 조사실 불러다 혼을 아주 쏙 빼놓았습니다. 그 뒤로 정춘실은 완전히 기가 죽어 다시는 김정일을 오라버니라고 부르지 못했던 것은 물론 기고만장도 쏙 들어갔습니다. 정춘실이 얼이 빠지자 김경희는 이 정도면 됐다 싶었는지 말년에 정춘실은 전천군 상업관리소 명예소장으로 있었습니다. 그리고 조사 과정에 기가 너무 빨렸는지 2015년 73세에 죽었습니다. 그래도 김정일보다는 오래 살긴 했습니다.
정춘실이 죽었을 때 김정은이 화환 하나는 보내주긴 했습니다만, 북한의 유일신에게 감히 오라버니라 불렀던 여성 간부의 최후는 쓸쓸했습니다. 이것 하나만 봐도 북한이 어떤 나라인지 잘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냥 봉건 왕조 국가인 것입니다. 그걸 사회주의라 포장해 여러분들을 속이며 계속 유지하는 것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답답할 따름입니다. 지금까지 서울에서 주성하였습니다.
주성하, 에디터 오중석, 웹팀 최병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