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성을 유린당하는 감시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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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북녘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요즘 북한 매체들을 보면 태풍 복구 현장을 중계하면서 연일 선전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걸 보면서 좀 답답합니다.

태풍 피해는 어쩔 수 없습니다. 한국도 태풍이 오면 다리도 끊어지고, 집들도 물에 잠깁니다. 그런데 그걸 복구하는 방식은 북한과 다릅니다.

북한처럼 우르르 군중동원 깜빠니아식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전문 건설 회사들이 동원돼 즉각 복구합니다. 물론 건설 회사들은 개인 또는 정부의 돈을 받기 때문에 손해는 아닙니다. 또 전문성이 있어서 매우 빠르게 복구하죠.

그런데 북한은 전문적이지 않는 사람들이 여기 피해보면 여기로 몰려가고, 저기 피해보면 저기로 몰려가며 복구를 합니다. 언제까지 이렇게 주먹구구식으로 나라를 운영할 겁니까. 건설로 돈을 벌어 살 수 있는 체계가 구축되면 알아서 전문적인 건설사들이 만들어져 가지 말라고 해도 돈 벌기 위해 남 먼저 피해 현장에 가서 복구를 하게 될 겁니다. 지금처럼 사람들이 억지로 동원돼 하기 싫은 일을 하지는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 와중에도 북한의 감시 체계는 여전히 잘 작동해서 피해 지역에 가서 언제까지 이렇게 사람들 내몰아서 할 거냐고 불만을 토로한 사람들은 정말 귀신같이 잡아서 정치범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불만은 많아도 말을 하지 못하고 내몰리죠.

모든 것이 한심한데 이 감시 시스템만은 잘 작동하는가 봅니다. 하긴 북한의 내부 감시 체계는 세계에서 따라갈 나라가 없을 정도이지요.

얼마 전에도 제가 황해도에서 보위부 상위로 있다가 바다로 헤엄쳐 내려온 청년을 만나 인터뷰를 했는데, 그의 말을 듣고 북한의 감시 체계를 다시금 느꼈습니다.

그가 보위부에서 맡았던 임무는 주민동태 감시 및 외부 ‘불순영상’ 시청 감시였습니다.

그가 있던 청단군 보위부는 보위원 한 명이 700~1,200명의 주민을 담당해 감시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보위원은 20~40명의 서약을 한 민간인 정보원을 둘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대략 주민 30명 중 한 명이 보위부 정보원인 것입니다.

어마어마한 숫자가 아닙니까. 여러분 주위에 30명 중 한 명이 보위부 정보원으로 숨어 있는 것입니다. 보위부 정보원은 수시로 수상한 동향을 보고해야 하는 것과 동시에 매년 보고서를 내야 합니다. 그렇다고 이에 대한 대가는 없습니다. 그냥 하라면 해야 하는 것이죠.

본인들도 하기 좋아서 하겠습니까. 안 한다고 하면 반동으로 몰리고, 또 각종 불이익을 받게 되니 어쩔 수 없이 시키면 하는 것입니다.

북에는 노동당 기관을 제외한 모든 곳에 보위부 정보원이 있는데 심지어 안전원 중에도 보위부 정보원들이 다 숨어 박혀 있습니다.

보위원은 정보원 외에도 협조원도 둘 수 있다고 합니다.

정보원이 되면 지장을 찍고 보위부 문서고에 서류가 보관되는 데, 협조원은 지장까지는 찍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 협조원 숫자는 보위원 능력대로 둘 수 있다고 하니, 30명당 한 명씩 있는 정보원에 더해 협조원까지 더하면 정말 주변 사람들 무서워서 어떻게 살겠습니까. 숨도 제대로 쉬기 어려운 것이죠.

헤엄쳐 넘어온 상위는 정보원을 22명 관리했다고 합니다.

지난달에도 제가 제주도에 가서 북에서 예술대학 교원을 하다 온 분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이 분의 탈북 사유도 기구합니다.

어느 날 혜산 12군단 보위부 반탐 담당 간부가 찾아와서 군관과 결혼한 제자가 한국 물품을 밀수하는 것 같은데, 증거를 잡아 신고하라 하더랍니다.

이 선생님은 처음에 옆집을 감시하라면 해도 어떻게 스승에게 제자를 신고하라고 하냐, 절대 못한다고 거절했습니다. 그러니까 보위부 간부가 평양 가서 공부하는 아들이 더 중요하나, 아님 제자가 더 중요하냐고 협박까지 하더랍니다. 아들을 걸고 협박하니 할 수 없이 생각해 보겠다고 하고 돌려보냈는데, 온밤 고민하다가 결국 제자를 찾아가 “보위부에서 너를 감시하는 것 같은데 조심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선생 한 명에게만 감시를 맡겼겠습니까. 이 제자는 끝내 남편과 함께 보위부에 체포됐는데, 이 선생까지 잡아가서 군단 보위부 감방에 가두었습니다. 고분고분 말을 듣지 않고, 제자를 감시하라는 요구를 거절했다는 이유 때문이었죠.

무려 76일간이나 대학 선생을 감방에 가두고 놓았는데, 나라에 충성을 하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던 이 선생님은 감옥 안에서 체제에 환멸을 느끼는 반동이 돼 버렸습니다.

감옥에 가니 중국에 인신매매했다는 이유로 사람들이 잡혀와 있는데, 엄마가 딸의 손을 잡고 와서 중국에 딸을 보내달라고 사정해서 돈도 안 받고 보내줬는데, 그 딸이 잡혀 와서 자기가 인신매매범이 됐다는 사연을 들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답니다.

“일제 때 종군위안부로 끌려간 여인도 엄마가 딸을 팔진 않았다. 이들이 죄인이 아니라 나라가 죄인이 아닌가. 수없이 많은 여인들이 중국 산골에 팔려가 맞아죽고 남몰래 암매장 돼도 어디에 하소연 할 수도 없는 것이 누구 탓일까.”

그런 생각을 하니 체제에 환멸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선생님은 4월 15일에 배려라며 마음 쓰는 듯 석방시켜 나왔는데, 마중 나온 남편이 76일 동안 목욕 한번 못하고 야윈 아내를 붙들고 눈물을 흘릴 때 이랬답니다.

“왜 울어. 저 새끼들이 좋으라고 우나. 울지 마.”

이미 그는 이 지옥에서 벗어나려고 마음을 먹었던 것입니다. 다행히 이 선생님은 한국에 무사히 왔지만, 남편과 아들을 탈북시키다 실패했고, 그들은 수용소로 끌려가 소식도 없게 됐습니다.

저는 한국에 온지 18년이 됐지만, 북한이 얼마나 지옥 같은 사회인지, 얼마나 멀쩡한 인간을 야만으로 만드는 사회인지 지금도 매일 새삼 깨닫고 있습니다. 태풍이 쓸고 간 폐허에 억지로 끌려가 감시 속에서 삽과 곡괭이를 휘두르며 이번 추석 연휴도 고생할 사람들이 참 안타깝습니다. 지금까지 서울에서 주성하였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