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성하의 서울살이] 학습 아닌 참회가 필요한 설날

0:00 / 0:00

사랑하는 북녘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북한에서 해가 바뀌면 꼭 하는 쓸데없는 짓거리가 올해도 어김없이 반복되고 있더군요. 옛날엔 신년사 학습, 그다음 공동사설이 됐다가 신년 사설이 됐다가 이번엔 전원회의 보고문헌 학습이란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노동신문 등 북한 매체들은 지난해 말에 열린 노동당 전원회의 보고문헌 학습 열풍이 전국적으로 불고 있다고 연일 보도하고 있습니다. 제가 북한에서 대학을 다니던 1990년대엔 방학을 일주일 앞당겨 학생들을 대학에 소환한 뒤 신년사를 달달 외우게 하고, 학부별로 문답식 경연도 했습니다. 운이 나쁘게 상대에게 지목당해 나섰다가 답변을 잘 못하고, 그래서 학부 탈락의 원인을 제공하면 졸업 때까지 찍혀 고생했습니다. 어디 학습만 합니까. 각 지역과 직장들에서 연일 전원회의 결정 관철 궐기대회와 군중시위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평양의 5월1일 경기장에서 열린 노동당 전원회의 결정 관철 궐기대회 사진을 보니 교통이 매우 열악한 평양에서 구호 몇 번 외치기 위해 새벽부터 10만 명이 모였더군요. 절반 이상은 걸어왔을 겁니다. 그럼 그날 일을 못 합니다.

그 10만 명이 일을 해보십시오. 한국의 시간당 최저임금이 8달러 정도 합니다. 8시간 일하면 64달러 받는데, 10만 명이 가장 최저임금을 받으며 8시간 일을 한다고 가정해도 하루 임금이 640만 달러가 됩니다. 다시 말하면 한국에선 10만 명을 하루 불러 쓰려면 최소 640만 달러 이상을 써야 하는 겁니다. 북한은 그런 귀중한 인력을 저렇게 쓸데없는 곳에 낭비하고 있습니다.

평양뿐만 아니라 지방까지 다 합치면 궐기대회를 하느라 날리는 기회비용이 수천만 달러는 될 겁니다. 잘 살려면 구호나 외치지 말고 돈 벌 수 있는 일을 시켜야 하는데 참 어이가 없는 짓이 매년 반복됩니다. 이것이 북한에서 반세기 동안 벌어져 온 일입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작년의 자랑찬 성과와 올해의 위대한 목표를 외우게 해 만들어진 것이 오늘의 북한입니다. 신년사의 성과만 종합해도 북한은 이미 공산주의는 물론 우주 최강국이 돼 있어야 맞습니다. 하지만 누구나 알다시피 그동안 북한은 가난한 시궁창으로 열심히 달려갔을 뿐입니다. 가장 가난한 나라들을 꼽으면 북한이 반드시 들어가죠.

김정은은 신년사도 읽기 귀찮은 지 4년째 전원회의 보고라는 문서를 만들어 전국에 하달하고 있습니다. 올해 보고에서도 “지난해에 괄목할만한 성과와 진전이 이룩되었다”고 했지만 도대체 미사일 열심히 쏜 것 말고 괄목할 성과는 무엇이고 어디로 전진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알 수 있겠습니까. 역시 모를 겁니다. 그냥 먹고 사는데 급급했던 한 해였을 뿐입니다.

올해에도 북한은 “12개 중요 고지들을 기본 과녁으로 정하고 점령 방도들을 구체적으로 명시했다”면서도 그게 뭔지 밝히진 않았습니다. 들으나 마나입니다. 방도는 늘 있었지만 실천을 못 했을 뿐이겠죠. 가령 “철도는 나라의 동맥”이라며 매년 방도를 내놓지만 현실은 기차가 다니는 게 신기할 정도이며 동맥경화로 죽게 됐습니다.

올해 김정은은 “다시 한번 1960년대, 70년대의 투쟁정신과 기치를 높이 들고 혁명의 난국을 우리 힘으로 타개해 나가자”고 했습니다. 상황이 어려울 때마다 김일성 만세를 부르던 케케묵은 과거가 소환됩니다. 그런데 북한은 그 과거부터 바로 잡아야 합니다. 시작부터 잘 사는 방향과 정반대의 길을 택했는데, 다시 처음처럼 기운을 내서 뛰어봐야 가난만 더 가까워질 뿐입니다.

북한이 과거에 잘못된 길을 택해 열심히 달린 것에 대한 책임을 김 씨 3대 에게만 물을 수는 없습니다. 1950~60년대를 살았던 우리 부모 세대의 업보도 있습니다. 북한에서 1인 수령체제를 강화하며 충성을 강요할 때마다 등장하는 표본 인물인 ‘태성 할머니’가 대표적입니다. 김일성에게 “종파놈들이 인민생활에 대해 떠들어도 염려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무조건 수상님을 지지합니다”고 했다는데, 김일성은 그 말에 힘을 얻고 반대파들을 단호하게 숙청했다고 하죠. 태성 할머니 말은 한마디로 “김일성 네가 하고 싶은 거 다 해”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김일성이 뭘 했습니까. 독재체제도 만들고 자자손손 권력을 세습해도 반항도 못 하게 만들었습니다. 돌아보면 그때 반당반혁명종파분자라고 처형된 사람들이 진짜 애국자들이었습니다.

지금 김정은이 바라는 1960년대의 투쟁정신이란 무슨 짓을 해도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따르고 굶어 죽어도 반항하지 않는 맹목적 충성심일 것입니다. 하지만 1960년대엔 배급이라도 주고 일을 시켰지만, 지금은 무보수 충성을 강요하니 그런 호소가 얼마나 먹혀들진 미지수입니다. 보수도 주지 않고 일 시키는 게 진짜 악덕 노예주죠.

이젠 북한 인민도 깨달아야 합니다. 설날부터 고지 점령 방도라는 의미 없는 헛소리나 매년 외우지 말고, 시키는 대로 다 해서 어떤 사회가 됐는지를 돌아봐야 합니다. 자신들이 어디에서 떠나 어디로 가는지, 왜 북한이 이렇게 됐는지를 고민해봐야 합니다. 과거에서 찾을 것은 투쟁정신이 아니라 맹목적 지지가 어떤 지옥을 만들었는지에 대한 교훈입니다.

올해 북한의 상황은 매우 어렵고, 굶어 죽는 사람도 많이 나올지 모릅니다. 그래도 김정은은 내년 전원회의 보고에서 또 어김없이 “괄목할만한 성과와 진전이 이룩된 2023년이었다”고 할 것입니다. 죽는 날까지 반복될 이 저주의 굴레를 자손들에게 넘겨주고 싶습니까.

북한 주민들도 이젠 노예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당장 거리에 나가 김정은 체제 타도를 외치라는 것이 아닙니다. 김정은이 외우라는 것을 외우지 않고, 하라는 것을 하지 않는 것부터 시작하면 됩니다. 하라는 대로 반세기 넘게 해봤으면 이젠 알 때가 됐죠. 그게 잘 사는 길이 결코 아니라는 것을 새해에는 꼭 깨달았으면 좋겠습니다. 지금까지 서울에서 주성하였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주성하, 에디터 오중석,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