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북녘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이번 주에 제가 북에서 974부대에 13년 근무했던 분을 만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974부대는 호위사령부를 의미하는데 북에선 5과에 뽑혀 간다고 하는 그 부대입니다.
저도 북에 살 때 제 동창 몇 명이 5과에 뽑혀 갔고, 친한 친구도 거기에 갔다가 땅크 바지 입고 휴가 나왔던 것도 봤고 했습니다. 제가 살 땐 거기에 가는 것을 영광으로 아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974부대는 김 씨 일가 호위사령부
13년 동안 휴가 한번 못 가고 경비 섰다
북한 김 씨 일가의 '특각(별장)' 경비 업무
그런데 한국에 와서 보니 그건 그냥 독재자를 위한 노예 생활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물론 북에서 노예가 아닌 사람이 어디 있겠냐만은 호위국 부대 병사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무려 13년을 휴가 한 번 못 가고 경비만 섰다고 합니다.
그가 복무한 기간은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이니 김정일 시절인데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겠죠. 5과 갔다 온 사람들은 제대 돼서도 절대 비밀을 말하지 않도록 서약하고 나옵니다. 그래서 북에 살아도 김 씨 일가가 어떤 호화생활을 했는지 알기 어렵습니다.
제가 만난 분이 근무한 곳은 원산과 창성 별장 등 4곳이었습니다. 북에는 김 씨 일가의 별장이 약 30개가 있는데, 북에선 특각이라고 부르죠.
원산 별장은 송도원소년단야영소 바로 옆에 있습니다. 이 별장을 1990년대 초반 무려 1,500명의 호위사령부 병사들이 지키고 있었는데 바다에서 침투할 것을 대비해 해상에도 잠수복을 입고 물 안에 들어가 경비를 선다고 합니다.
김정일은 자식이 많았죠. 작가동맹 위원장을 지냈던 이기영의 맏며느리이자, 유명한 영화배우였던 성혜림을 남편과 강제 이혼시키고, 딸도 버리게 하고 데려다 1972년 김정남이란 아들을 낳게 했고 이후 김영숙이란 정식 부인 그리고 김정은의 모친인 고용희, 평양음악무용대학을 졸업한 김옥 등 여자 문제가 정말 복잡했죠. 이렇게 낳은 아이들을 평양이 아닌 원산에 별장 하나씩 지어주고 살게 했답니다.
평양에 있으면 사람들이 김정일의 방탕한 생활을 알게 되니 그렇게 했나 봅니다. 학교 갈 나이가 되면 스위스에 보내 유학시켰죠.
특각에서 가장 많이 본 여인은 김옥
1994년 북핵 위기 등 긴장이 높아지면 김정일은 창성 별장에 머물러
3천 600명의 호위병이 창성 별장 지켜
원산 별장에서 근무 서면서 이 분은 김정일을 여러 번 보았습니다. 그 안에 많은 여인과 아이들이 있었는데 이름은 모르고, 그냥 장군님, 어머님이고 김정일 아들딸들은 대장님, 공주님이라고 불렀답니다. 그때 벌써 북한은 왕조였던 것입니다. 경비병들에게 김정일의 자식을 공주라고 부르라 했으니 말입니다.
이 분은 여름이면 김정일이 여성 한 명 또는 두 명과 팔짱을 끼고 수영을 하는 모습 등을 봤는데 가장 많이 본 여인이 김옥이었다고 합니다. 원산 별장에선 김옥이 사모님으로 알려진 것입니다.
고용희는 본 기억이 없다는 것을 봐서 고용희는 딴 곳에 숨겨둔 모양입니다.
김정일의 자식들은 어려서부터 승마를 의무적으로 배우게 했답니다. 김정은이 최근 말을 타는 모습이 기록 영화에 나왔는데 김정은뿐만 아니라 김 씨 패밀리는 모두 승마를 어렸을 때부터 의무적으로 배우게 했다고 합니다. 아마 김정은이 아니라 다른 자식이 집권했어도 말을 타는 것을 좋아했겠죠. 북에선 일반인이 말을 탈 수가 없습니다. 승마는 상놈과 구별되는 김 씨 패밀리만의 호화 체육인 것입니다.
원산 별장에서 2년 경비 서다가 이 분은 창성 별장에 가서 7년 복무했습니다. 창성은 수풍호 옆에 있는 천혜의 요새입니다. 수풍호를 건너면 바로 중국이죠. 그래서 김일성이 창성에 별장을 지었습니다. 6.25전쟁 때 혼이 나서 도망칠 기지가 필요했나 봅니다. 여러분들은 김일성이 왜 1960년대 창성에 그리 많이 가서 현지 지도했는지 궁금하시죠. 그냥 별장에 놀려 다니다가 주변에 나와 이런저런 지시를 한 것입니다.
그런데 김정일도 창성을 좋아했습니다. 1994년 북한 핵위기 등 한반도 긴장이 높아지면 김정일은 예외없이 창성에 와 있었다고 합니다. 죽을까봐 두려워 폭격이 어렵고 여차하면 중국으로 도망칠 수 있는 요지인 창성에 숨어있었던 것입니다.
창성은 원산 별장보다 근무 인원이 두 배로 많아서 3,600명이나 있었다고 합니다. 3,600명의 20대 청년들이 휴가 한 번 못 가보고 산꼭대기에 올라가 10년 넘게 경비만 선 것입니다. 1994년 이전 김일성이 살아있었을 때 벌써 김정일은 아버지의 별장을 하나하나 뺐었습니다. 창성도 1990년대 초반 김정일의 수중에 넘어왔는데 이렇게 아버지의 별장을 뺏으면 김정일은 그 별장을 다 폭파시키고 새로 짓게 했다고 합니다. 창성은 지하 3층까지 다 다시 지었고 김일성 별장은 기존 별장에서 20~30리 떨어진 곳에 따로 짓게 했답니다.
이런 식으로 하다보니 1994년 김일성이 죽기 전에 그가 소유한 별장은 묘향산과 서포 두 곳만 남고 나머지는 다 김정일 것이 됐습니다.
창성 별장에도 김정일은 김옥을 데리고 많이 다녔습니다. 그래서 이 분은 김옥이 김정일의 처인줄 알았는데 나중에 고용희가 나타나고 김정은이 나타나니 놀랐다고 합니다.
김 씨 일가가 전국의 별장을 다니며 얼마나 호화스럽게 살고 있는지 더 말해 뭐하겠습니까. 이제는 김일성도 죽고 김정일도 죽고 했으니 특각들을 김정은이 다 물려받았죠. 김정은 역시 기존 특각들을 다 폭파하고 자기만의 특각을 다시 지었을 것입니다. 김정은은 한 수 더 떠서 아예 특각 옆에 전용 비행장들까지 지었습니다. 김정일은 비행기를 타지 않았는데 김정은은 오전에 창성에서 스키보트 타며 놀다가 오후에 원산 가서 수영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김 씨 일가의 호화생활을 외부에 드러나지 않게 경비하기 위해 무려 3만 명이 넘는 청년들이 5과라고 뽑혀 집에도 못 가고 경비를 섭니다. 그렇게 살던 김정일을 보고 사람들은 쪽잠에 줴기밥 먹으며 고생하고 있다고 세뇌됐고, 김정은을 보며 우리 때문에 수척해졌다며 눈물까지 흘립니다. 언제면 이런 멍청한 희극이 끝날까요. 지금까지 서울에서 주성하였습니다.
** 이 칼럼 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주성하, 에디터:오중석, 웹팀: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