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북녘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요즘 북한 돌아가는 꼴을 보니 하도 어이가 없어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여러분들도 아마 저랑 같은 심정일 겁니다.
대표적으로 10살 어린 여자애한테 머리 허연 장령들이 머리를 조아리고, 급기야 8일에는 김일성광장 열병식에서 군인들이 주석단에 오른 김주애를 향해 ‘백두혈통 결사보위’라는 구호를 열심히 외쳤습니다. 열병식에서 백두혈통을 결사보위하겠다는 구호가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세습 독재체제의 노예로 전락한 청년들이 10세 어린애를 향해 충성을 맹세하는 씁쓸한 장면을 보면서 저는 북한땅을 인질처럼 타고 앉아 4대째 향락을 누리고 있는 지긋지긋한 ‘백두혈통’에 저주를 보내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만민 평등의 사회주의를 만든다는 사기에 속아 반세기 넘게 살았는데, 이제는 혈통을 결사보위하라는 노골적인 협박을 듣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어느 때인데 혈통을 운운합니까. 4차 산업혁명으로 세계가 너무나 빨리 변화되고 있는데 북한은 거꾸로 가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 백두혈통이란 것은 알고 보면 순전히 운발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제가 예전에도 한번 말씀드리긴 했습니다만, 중국 연변에 김일성의 부대였던 항일연군 2군 6사 출신의 여영준이라는 사람이 1990년대 초반까지 살았습니다. 해방 후 북에 나가지 않고 고향인 연변에 남았던 항일연군 출신 중의 한 명입니다. 그는 생전에 회고록도 남겼는데, 자신을 찾아온 작가에게 이런 증언을 했습니다. 그 내용을 그대로 옮긴다면 이렇습니다.
“한번은 김일성에게 이렇게 물어보았던 적이 있다. ‘우리가 이렇게 먹을 것도 못 먹고 입을 것도 못 입으면서 일제와 싸우느라 고생하고 있는데, 언젠가 왜놈을 다 몰아내고 해방이 되면 공산당에서 우리한테 무엇을 시킬까요?’ 그랬더니 김일성이 이렇게 대답하더라. ‘나는 안도 사람이고 안도에서 많이 활동해 왔는데 최소한 안도현장쯤이야 시켜주겠지’ 그래서 우리 몇은 김일성의 주변에 모여 앉아 ‘너는 김 정위 밑에서 안도현의 공안국장을 하고 나는 안도현의 위수사령관을 하마’ 하고 말장난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때까지 김일성도 북조선에 돌아가 이렇게 한 개 나라를 세울 줄은 정말이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해방 후 안도현장이 되는 게 꿈이었던 김일성은 상관들이 전사하거나 투항하는 바람에, 그리고 또 싸우라는 2군 지휘부의 명령을 묵살하고 맨 먼저 소련으로 도망간 덕분에 끝까지 살아남았습니다. 김일성이 부하 10여 명과 보고도 없이 소련으로 도주하는 바람에 위증민이 지휘하는 2군 사령부는 김일성을 변절자로 규정하고 체포하라는 지시까지 내렸습니다. 이후 상관인 위증민도 죽었고, 김일성은 살아남은 자들 중 고위급이라 결국 북에 돌아와 지도부에 입성했습니다. 해방 후 78년 동안 북한은 왕이 된 김일성과 그의 부하들, 그들의 자손들을 위한 나라였습니다.
운 없이 그 땅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출신성분이라는 55개의 씨실과 사회성분이라는 4개의 날실로 구성된 계급 사회에서 꼼짝달싹 못하고 살아야 했습니다. ‘혁명가 가족’으로 태어나면 바보라도 간부가 됐지만 ‘지주, 자본가, 종파, 종교인’ 등의 출신성분으로 태어나면 아무리 똑똑해도 힘든 육체노동에 시달려야 합니다. 농민이라는 사회성분이면 평생 농촌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백두혈통 결사보위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운명이 출신성분이라는 바둑판 위에서 결정되는 이런 사회를 대대손손 목숨을 걸고 지키라는 뜻입니다. 그게 어디 지킬 가치가 있는 일입니까. 김 씨 왕조가 여러분들에게 해준 것이 뭐가 있습니까.
지키라는 것이 어디 백두혈통 뿐입니까. 김정은은 집권 이후 백두의 혁명정신을 따라 배우라며 겨울마다 사람들을 백두산에 내몰고 있습니다.
백두의 혁명정신을 내세워 수혜 본 자들은 뜨뜻한 곳에 앉아 채찍질을 하고, 노예가 된 자들이 칼바람 속에서 백두산에 오르고 또 오르고 있습니다. 영하 40도의 기록적 한파가 찾아온 지난달에도 수천 명이 깃발을 들고 무거운 배낭을 메고 며칠 동안 백두산에 오르다가 동상을 입은 사람들이 속출했습니다.
어린애를 새 주인으로 내세운 지금 북한 인민들은 백두의 혁명정신의 본질을 깨달아야 합니다. 백두의 혁명정신은 노예의 정신이 아닙니다. 백두의 혁명정신의 본질은 ‘혈통 뒤집기’ 정신이고, 계급 타도 정신입니다.
백두혈통이란 것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비천한 묘지기 혈통이 나옵니다. 묘지기 김응우의 증손자 김일성과, 비슷한 처지의 까막눈 소작농들은 총을 잡고 타고난 팔자를 바꾸었습니다.
그들은 유격투쟁을 했다는 경력을 내세워 권력을 잡은 뒤 자신들이 섬기던 부자들을 죽이고, 그 자손들을 노예로 만들었습니다. 무산계급이 유산계급을 타도한 셈인데, 문제는 그 유산계급의 자리를 자기들이 차지하고 80년 가까이 대대손손 떵떵거리며 살고 있습니다. 4대까지 해먹으면 너무 해먹는 것이 아닙니까. 4대까지 차별받는 사람들은 또 뭔 죄입니까.
북한 사람들은 백두산에 가서 주어진 운명을 바꾸는 그런 정신을 배워가야 합니다. 콘크리트처럼 굳은 신분세습, 계급사회를 목숨 걸고 뒤집어버리고 정해진 운명을 바꾸는 것이 바로 혁명이고, 백두의 혁명정신이 아니겠습니까.
백두혈통에게 반항하면 일족을 멸족시키는 연좌제 속에서 무장투쟁이 엄두가 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탈북하는 것도 백두의 혁명정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목숨 걸고 남쪽에 온 보상으로 본인뿐만 아니라 자손들까지 노예의 굴레를 벗고 행복하게 살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무슨 혈통이란 것들을 섬기지 않고, 내가 주인이 돼 살 수 있습니다. 주어진 운명을 박차고 목숨 걸고 새 세상을 만드는 것이야 말로, 북한 인민이 따라 배워야 할 백두의 혁명정신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서울에서 주성하였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주성하, 에디터 이예진,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