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북녘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요즘 한국의 문화예술이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제작한 드라마 즉 티비연속극들은 전 세계 사람들이 가장 많이 보는 드라마 순위 1위에 수시로 오르고, 세계는 한국 젊은 가수들에 열광합니다. 그 덕분에 세계 어디 가서나 한국 즉 ‘사우스 코리아’에서 왔다고 하면 대접 받습니다. 가수 누굴 아느냐, 한국 배우 누구를 자기가 제일 좋아한다는 등 한국 문화예술을 주제로 하면 쉽게 말이 통합니다.
북한 사람들도 한국 드라마 몇 개 보면 빠져들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김정은이 한국 드라마 보면 몽땅 잡아간다고 하는 것이죠. 자기가 잘 만들 생각을 해야지 발전된 것을 보면 감옥에 보내고 죽이겠다고 하니 북한이 발전할 수가 있겠습니까. 북한은 1960년대부터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잘 나가는 사람들 다 잡아 죽이거나 숙청해 인재들을 매장해왔습니다. 그리고 독재를 찬양하는 자들만 살려두고 써먹었죠.
제가 한국에 오니 문학예술 분야에 제가 모르는 천재들이 많았는데 그 중에는 북한에서 죽은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북한에선 이름도 몰랐는데, 여기선 100년이 지나도 잊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그 중에는 백석이라는 시인도 있습니다. 오늘은 북에서 죽은 수많은 인재 중의 한 명인 시인 백석에 대한 이야기 한번 해볼까 합니다.
백석은 2005년 한 시 전문매체가 시인 156명을 대상으로 지난 100년 동안의 시집 중에서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시집이 무엇인지 설문 조사했을 때 1위를 차지했던 시인입니다. 즉 세기를 풍미한 시인인 것입니다.
북한에서 알려진 시인은 ‘나의 조국’을 쓴 김상오나 ‘어머니’를 쓴 김철, 조기천 등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어용시인들은 나중엔 이름도 없을 겁니다. 물론 김상오나 김철이 북한 시인 중에선 재능이 있는 것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다 해방 후에 김일성 정권이 들어서서 문학 생활을 한 사람들입니다. 시적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이라면 어떻게 공산당의 획일적인 감정에 맞출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결국 다들 한번씩 혁명화를 가죠.
김철은 1950년대 러시아 혼혈인 여인과 좋아해서 “당원증이냐 여자냐”를 택하라고 할 때 서슴없이 당증을 내놓고 단천 광산에 갔습니다. 그런데 그의 지조는 죽을 때까지 가지 못했죠. 광산에서 폐인이 되고, 자식도 있으니 김일성에게 아부하는 시를 계속 써서 보내다가 21년 만에 복권됐습니다. 살려고 지조를 버린 것이죠. 생각해보세요. 탄광 노동자가 무슨 ‘어머니’ 시에서 나오는 것처럼 당의 사랑에 감격할 일이 있겠습니까. 김상오 역시 14년이나 혁명화 하다가 결국 지조를 꺾고 아부하는 시를 바쳐서 살아난 경우입니다. 조기천은 1951년에 폭격으로 죽어 아부할 기회도 없었죠.
그런데 백석은 김철이나 김상오와는 차원이 다른 시인입니다. 이미 일제 시기에 그는 한반도를 풍미하는 시인이었습니다. 해방 후에야 시를 쓰기 시작한 김상오나 김철에게 백석은 감히 쳐다보기 어려운 거장이었죠. 물론 나이를 보면 백석은 김일성과 동갑인 1912년생이고 김상오가 1917년생으로 다섯 살 아래, 1933년생인 김철은 백석의 아들 뻘이나 되겠죠.
평북 정주에서 태어난 백석, 본명 백기행은 당대의 명문학교인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유학을 갔다가 1934년 조선일보 기자가 된 뒤 시를 씁니다.
백석의 시에 반해 당시 서울에서 내로라하는 신녀성들이 줄줄 따라다녔는데, 그때는 연애가 자유로운 때이니 다 가능했죠. 그 중에는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서울 성북구에는 7000평방미터 넘는 넓은 부지에 있는 길상사라는 절이 있습니다. 이 절은 서울에서 가장 유명한 요정이었던 대원각이라는 기생집 자리인데 그 기생집을 운영하던 여인이 1987년, 불교에 기부해서 지금 절이 됐습니다. 1987년 그때 가치가 1억 달러쯤 됐으니 지금으로 치면 5억 달러쯤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 어마어마한 재산을 내놓은 여인이 해방 전에 백석의 애인이었다고 합니다. 엄청난 거액을 내놓을 때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 돈을 기부하냐”고 놀라자 그 여인이 “1000억 이란 돈도 백석의 시 한 줄보다 못하다”고 했답니다. 당대의 기생이 백석을 못 본지 40년이 넘었는데도 그때까지 마음에 담고 있었고 수억 달러의 돈보다 백석의 시 한 줄이 더 값이 있다고 한 것입니다.
그 백석은 정작 해방 후에 스승이었던 조만식 선생의 비서로 있다가 전쟁 때 월남하라는 권고를 무시하고 북에 남았습니다. 가족을 버리고 갈 수 없다고 남았는데, 전쟁이 끝나서 10년 정도는 시인으로 있었습니다. 워낙 뛰어난 시인인 것을 평양에서도 다 아니까 말입니다. 하지만 김일성 찬양시를 쓰라니 거절했는데 그래서 1959년 삼수갑산으로 추방됐습니다. 백석 역시 인간인지라 숙청에서 벗어나려고 김일성 찬양시 3개를 썼는데 그게 도저히 몸에 맞지 않아서인지 1962년 절필했습니다. 그리고 1996년 죽을 때까지 삼수의 농장에서 양치기를 했다고 합니다.
고난의 행군 때 굶어죽진 않았을까요. 그런데 한국에서 워낙 기억하는 유명한 시인이어서 그런지 한국에 그가 1980년대 찍었다는 가족사진이 하나 들어왔습니다. 깡마른 천재 시인은 밭을 배경으로 허름한 옷을 입은 채 앉아있었는데, 기품은 여전히 살아있더군요. 한반도의 100년을 풍미한 세기의 시인을 북한은 그렇게 매장시켰습니다.
어디 백석뿐입니까. 북한에서 간첩으로 몰려 처형된 임화도 유명한 시인이었습니다. 홍명희나 박태원은 차마 김일성을 찬양 못해 역사소설이나 쓰며 목숨을 부지했죠. 이렇게 뛰어난 재능들을 숙청시킨 북한에서 어떻게 문화예술이 발전하겠습니까. 김정은 만세만 부르는 영혼 없는 아부꾼들이나 득실대니 망하는 길 밖에 없는 겁니다. 지금까지 서울에서 주성하였습니다.
** 이 칼럼 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주성하, 에디터 오중석,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