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북녘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김정은이 이번에 3박 4일이나 전원회의를 열고 농업문제를 해결하겠다고 했는데, 애초에 저는 기대 같은 게 없었지만 결론은 역시나 였죠. 농업생산 고지를 무조건 점령하라, 정보당 생산성을 늘려라, 당적 지도와 당 사업을 강화하라는 뻔한 소리만 늘어 놓았습니다. 그럴 거면 전원회의는 왜 합니까.
비료 없고, 농기계 없어서 생산량이 나오지 않는 것을 개나 소나 다 아는데, 김정은이 그걸 몰라서 이럴까요. 아니죠. 아사자가 나오니 나는 최선을 다 했다, 실패한 것은 내 지시를 따르지 않은 간부들 잘못이다 이렇게 핑계거리를 만들려는 것이죠. 아직도 이런 수법에 속는 사람은 없겠죠. 북한이 먹고 살려면 농기계나 비료보다 더 중요한 것은 협동농장부터 없애야 합니다. 그거 밖에는 답이 없습니다.
이웃 중국만 보십시오. 찢어지게 가난하다가 개혁개방으로 땅을 나눠준 다음에 부자가 되지 않았습니까. 피둥피둥 살찌고요. 중국도 과거 굶어 죽을 때 양상을 보면 북한과 똑같았습니다. 개혁개방 전에 농촌은 인민공사, 생산대대, 생산대로 생산단위가 구성됐는데, 이건 북한의 협동농장, 작업반, 분조와 똑같은 체계입니다. 그런데 이런 인민공사 체계에서 농민들이 일할 리가 없었죠. 그때 이런 말이 돌았습니다.
“작업 시작을 알리는 생산대 대장의 첫 번째 호루라기에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 두 번째 호루라기에는 머리를 들어 쳐다 본다. 세 번째 호루라기에는 천천히 움직인다. 밭에 도착해서는 호미를 두고 왔다고 둘러대고 다시 집에 다녀온다”
어떻습니까. 북한과 똑같지 않습니까. 개혁개방을 이끈 작은 거인 덩샤오핑, 즉 등소평은 이렇게 해선 중국 몇 억 인구를 먹여 살리지 못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침 1978년에 상해 인근에 있는 안후이성에 100년 만의 가뭄이 와서 또 다시 대량 아사가 닥쳐오게 됐습니다. 등소평은 안후이성에 심복인 완리를 당서기로 내려 보냅니다. 완리는 나중에 부총리, 전인대 위원장 등을 지냈는데, 1916년에 태어나 2015년 사망까지 우리 나이로 치면 100세 장수한 사람입니다.
그때 안후이성이 작지는 않았습니다. 농민만 4000만 명인데, 완리는 부임 3달 동안 농촌만 돌아다녔습니다. 처음에 그가 어느 농가에 가 보니 노인과 나이가 찬 딸 두 명이 있었지만 당서기가 방문했는데도 앉아만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모두 바지가 없어 얇은 천 하나로 함께 몸을 감싸고 있느라 일어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번엔 젊은 부부가 두 아이를 키운다는 농가를 방문했는데 아이들이 안 보여 어디 갔느냐고 묻자 마지못해 큰 가마의 뚜껑을 열어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가마 안에는 벌거벗은 여자아이 두 명이 수줍게 웃으며 앉아 있었는데, 아이들이 추위를 피하도록 밥을 짓고 난 뒤 온기가 남은 솥에 앉혀 둔 것입니다. 완리는 두 집을 나온 뒤 우리가 사회주의를 이렇게 오래 했는데 아직도 이렇게 살고 있냐며 눈물 흘리며 탄식했습니다. 북한 같으면 이런 간부는 처형되고 가족은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갔겠죠.
완리가 조사해보니 성 농민 4000만 중에 3500만 명이 심각한 빈곤이었는데 이들에게 희망을 물으니 모두의 대답이 똑같았습니다. “첫째도 배부르게 먹는 것, 둘째도 배부르게 먹는 것, 셋째도 배부르게 먹는 것”이었습니다. 완리가 고민을 거듭하고 있던 때쯤에 안후이성 펑양현 샤오강촌이란 곳에서 아주 중요한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지금 샤오강촌은 중국 농업개혁의 발원지라고 불리는 곳인데, 당시만 해도 농민들이 굶어 죽기 직전이었죠.
그러니까 샤오강촌 농민 18명이 비밀리에 모여 혈서를 썼습니다. 내용은 “농토를 집집마다 나눈다. 만일 주동자가 감옥에 갇히거나 처형되면 남은 사람들이 그의 자녀가 18세가 될 때까지 돌봐준다” 이랬습니다. 그때만 해도 중국의 농민들이 땅을 나눠 갖는다는 건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었는데, 목숨 걸고 개인농하자고 결의한 것입니다. 농민들은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란 절박함으로 각서에 손도장을 찍었습니다.
그렇게 개인농을 해보니, 결론은 그들의 가난이 땅과 가뭄 탓이 아니더라는 겁니다. 인민공사에서 적당히 일하고 적당히 게으름 피우던 농민들은 개별 영농을 시작한 이후 너나없이 이른 새벽부터 밤늦도록 부지런히 일했습니다. 그리고 그해 생산량은 깜짝 놀랄 정도였죠. 인민공사 때 짓던 것보다 무려 5배나 수확량이 더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주변에서 모두 놀랐고, 그 비밀이 드러나지 않을 수가 없었고, 소문이 급속히 퍼졌습니다. 이때만 해도 중국 인민일보에선 개별 영농을 부정하는 글이 실릴 때였습니다.
이때 성 당서기 완리는 용감했습니다. “나라와 인민에 도움 되는 일을 왜 못하냐. 일이 잘못되면 내가 책임진다”며 샤오강촌 농민들을 옹호했던 것입니다. 마침 중국도 개혁개방으로 나갈 때였고, 덩샤오핑도 묵인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982년 1월 중국 공산당은 ‘제1호 문건’을 통해 샤오강촌의 방식이 사회주의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1985년엔 중국에서 인민공사가 폐지됐습니다. 중국은 1979년부터 1984년까지 지역별로 점차 개인농으로 넘어갔는데, 1984년의 농업생산량은 5년 전보다 33% 늘어났습니다.
여러분, 지금 김정은은 중국에서 40년 전에 없앤 협동농장을 아직도 붙들어 잡고, 당 사업이 어쩌니, 혁명정신이 어쩌니 떠들고 있습니다. 집권 이후 김정은이 농촌에 도대체 몇 번이나 가봤습니까. 농민의 집에 들어가 본 적이 단 한번도 없는, 이런 시대착오적인 김정은 밑에서 여러분들에게 차례질 것은 굶어죽는 길밖에 없습니다. 차라리 샤오강촌 농민들처럼 누가 처형되면 자녀를 18세까지 서로 돌봐준다는 혈서라도 써서 노동당이 시키는 대로 하지 않는 게 여러분들이 살 길일 것입니다. 지금까지 서울에서 주성하였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주성하, 에디터 오중석,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