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성하의 서울 살이] 한국 정착 20주년을 맞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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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북녘 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이번 주, 3월 16일은 제가 탈북해서 한국에 도착한 지 딱 20년째 되는 날입니다. 대한민국에서 새로 태어난 지 20번째 생일날이죠. 그래서 오늘은 한국에서 산 20년을 한번 돌아볼까 합니다.

제가 탈북해 중국에 있을 때엔 한국으로 가는 동남아 루트나, 몽골 루트 이런 것이 일반에 알려지지 않을 때였습니다. 2001년에 북송돼서 감옥 6개 옮겨 다니며 죽을 고생 하다가 겨우 다시 살아 중국에 왔는데, 한 3개월은 감옥 어혈이 빠지지 않아 움직이지 못하겠더라고요. 붓고 내리고 붓고 내리고 하는 게 세 번쯤 반복된 것 같았습니다. 이제 다시 잡혀 북송되면 무조건 죽으니까 빨리 한국에 가야 하는데 가는 길을 모르겠더라고요. 열심히 노력해서 한국으로 보내주는 브로커를 찾았고,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 입국한 날이 2002년 3월 16일이었습니다.

중국 장춘공항에서 심장이 터질 듯한 긴장 속에 출국 심사를 통과하던 일, 하늘에서 내려다 본 첫 한국 땅, 인천공항에서 탈북자라 신고하던 순간 등이 여전히 생생합니다. 반년 전까지 탈북했다가 북송돼서 북한 감옥에서 운신이 어려운 폐인이 되던 제가 새 삶을 선물 받은 날이기도 합니다.

와서 여러 조사를 마치고 하나원 거쳐 사회에 나온 날이 6월 11일인가 됐습니다. 도착해서 빈 집을 청소하고, 밤에 누워서 천정을 말똥말똥 쳐다보며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지”하며 걱정하던 때가 어제 같습니다.

처음에 상자 나르는 일부터 시작해서, 여러 일자리를 경험해보았고, 2002년 10월 한 주간지 기자로 입사했습니다. 그러다가 2003년 여름 어느 저녁 퇴근길 지하철에서 동아일보 채용 공고를 보고 지원했습니다. 동아일보 합격 통지를 받던 때와 거의 동시에 6개월이나 걸린 국정원 입사 시험에도 합격했는데 양지와 음지 중 어느 쪽에 갈까 고민하다가 양지를 선택했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그것이 제가 한국에서 내린 가장 훌륭한 결정이라고 생각합니다.

탈북해서 중국에 있을 때 라디오에서 한국에 입국한 탈북민이 1천3백 여명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빨리 가서 1천500백 안에는 들어가자”고 결심했는데, 이후 체포돼 중국과 북한의 6개 감옥을 전전하다가 겨우 살아오고 보니 2천 몇 번째였습니다. “너무 늦게 와서 내가 갈만한 자리는 없겠다” 싶었는데 이후 3만4천 명이나 탈북해 올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지금은 뒤늦게 온 탈북민을 만나면 “내가 참 빨리 와서 다행이다”는 말을 자주 합니다.

제가 아직은 북에서 산 세월이 더 길긴 하지만, 솔직히 유치원 이전은 잘 기억도 못하지 않겠습니까. 학생 생활도 그렇고, 북에서 1년 직장 다니긴 했지만, 사실 인생의 직장 생활은 한국에서 다 했습니다. 북한보다는 이젠 서울 지리에 훤한 완벽한 서울시민이 된 겁니다.

정착 초기 몇 년을 돌아보면 산에서 살다가 도시로 내려온 타잔에 비유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20년을 살다 보니 아스팔트 위에서 구두를 신고도 맨발로 숲속을 달리던 만큼 빨리 달릴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겨났습니다.

제가 남쪽에서 20년을 살았다면 아마 대다수 사람들이 “20년 살아보니 어떻습니까”라고 물을 것 같습니다. 이 질문엔 할 말이 참 많을 것 같기도 하고, 또 없기도 합니다. 그냥 하루하루 열심히 살다 보니 20년이 지난 것 같습니다.

한국에 처음 도착했을 때의 저는 혁명가의 꿈이 심장에서 펄펄 끓는 청년이었습니다. “내 생애엔 북한이 반드시 붕괴될 것이고, 그때면 다시 돌아가 고향 사람들을 선진국 국민으로 만들기 위해 한목숨 바칠 것”이라는 확실한 목표가 있었습니다. 언론인의 길을 선택할 때 북한이 가장 암살하고 싶은 사람으로 살겠다는 비장한 다짐도 했습니다. 지금은 후배들과 술자리에서 “20년이나 살 줄 알았으면 일찍 집이나 사놓았을 걸 그랬다”는 농담을 자주 하는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뜻을 이루지 못한 망명가로 생을 마무리할까 봐 솔직히 가끔 겁도 납니다.

만약 앞으로 20년 안에 김정은 체제가 붕괴되면 저는 할 일이 많을 겁니다. 북에 돌아가 북한 부흥의 설계를 하고 싶습니다. 그렇지만 걱정되는 일도 있습니다. 서울에서 오랫동안 살면서 이 사회에 동화되다 보니 북한 사람들이 저를 어떤 시각으로 볼까, 저의 뿌리를 인정해 북한 사람으로 받아들일까, 아니면 한국 기자로 볼까.

한국에 사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저 자신에게도 “너는 북에 가서 뿌리 내리고 살 수 있냐” 이런 자문자답도 합니다. 서울에서 산다는 것은 세계적인 선진국의 시민으로 산다는 것이고 정말 모든 것이 편하고 잘 돼 있습니다. 이제는 이런 선진 문명에 익숙돼서 “만약 당장 북한 체제가 붕괴된다면 20대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북에 돌아가 살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는 겁니다. 북한에서 “뉘기요? 어째 왔소?”라는 억센 사투리에 둘러싸인다면 이젠 저 자신도 이질감을 느낄 것 같고, 북한 사람들도 저를 한국 사람이라 받아들일 것 같습니다. 서울에선 탈북기자로 불리고, 평양에선 남쪽 기자로 불리면 이건 어디든 소속감이 없는 경계인의 삶이 아닌 가 이런 걱정도 합니다.

그러나 “네가 왜 목숨 걸고 여기에 왔는지 잊지 말라”며 여전히 불쑥불쑥 심장을 두드리는 무엇인가가 제 안에 남아있는 한 저는 기꺼이 남북의 경계선에 서 있을 것이고, 이것이 죽을 때까지 바뀔 수 없는 저의 운명인 듯싶습니다. 만약 김정은 체제가 붕괴되면 저는 어찌 되던 북에 돌아갈 것이고, 눌러앉을지 말지는 그때 가서 봐야겠지만, 북한 사람들이 제가 필요하고 하면 거기서 살아야겠죠.

마지막으로 한국 정착 20주년을 맞아 저는 지금까지 열심히 살아온 제 인생에 감사하고, 앞으로 10년 뒤 다시 여러분들에게 한국 정착 30주년 소감을 말하는 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지금까지 서울에서 주성하였습니다.

** 이 칼럼 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주성하, 에디터:오중석, 웹팀: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