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성하의 서울살이] 탈북민 1호는 누구?

0:00 / 0:00

사랑하는 북녘 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랜 탈북의 역사에서 2024년은 또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한 해가 될 예정입니다. 바로 대한민국 정부가 올해 7월 14일을 북한이탈주민의 날로 선포하고 국가 기념일로 제정했기 때문입니다. 북한이탈주민은 탈북민을 지칭하는 정부의 공식 용어입니다.

올해 1월 16일 윤석열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북한이탈주민의 포용과 정착지원을 위해 북한이탈주민의 날 제정을 주문했고, 행정안전부가 5월 21일, 이를 법으로 만들어 공포했습니다.

국가 기념일이 됐다고 해서 이날 전 국민이나 탈북민이 따로 쉬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7월 14일엔 각종 기념식과 행사가 열리게 되고, 올해는 특히 1회이기 때문에 탈북 과정에서 희생된 탈북민들을 기억할 수 있는 기념물도 만들어질 예정입니다.

탈북민이 얼마나 입국했는지에 대한 통계는 분기마다 집계가 되는데 올해 3월 말까지 한국에 입국한 탈북민은 모두 3만 4,121명입니다.

그런데 이건 입국 통계이지 실제로 한국에 3만 4 천 명이 산다는 말이 아닙니다. 사망한 사람도 많고 또 한국에서 살다가 해외에 나가 사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렇게 보면 지금 한국에서 사는 탈북민 숫자는 3만 명이 안 될 수도 있지만, 실제 거주자 통계는 이뤄지지 않아 정확한 숫자는 알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 탈북민 입국 통계는 언제부터 시작됐을까요.

이번에 북한이탈주민의 날로 제정된 7월 14일은 1997년에 북한이탈주민의 법적 지위와 정착지원 정책의 근간이 되는 ‘북한이탈주민의 보호 및 정착지원에 관한 법률’이 시행된 날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때부터 탈북민 숫자를 센 것은 아닙니다.

탈북민 숫자가 집계된 것은 훨씬 이전부터인데 정부 기록에 따르면 탈북민 1호는 1948년 9월 15일 입국한 김정수 씨입니다. 1925년 3월 10일 생인 김정수 씨는 당시 지명으로 진남포, 현재 남포에서 살다가 23세에 체제 불만으로 월남했고, 1986년 7월 8일에 61세의 나이로 사망한 것으로 나옵니다.

그런데 해방 이후에 많은 사람들이 월남했는데 왜 집계는 1948년 9월부터 이뤄졌을까요. 1948년 8월 15일 남쪽에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고, 9월 9일엔 북한 정부가 출범했습니다. 즉 이때부터 한반도에는 2개의 정부가 들어서게 됐는데, 그 때문에 1948년 9월에 넘어온 월남자부터 탈북으로 인정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월남 또는 탈북이나 귀순이란 용어가 공식화된 것은 또 한참 뒤의 일입니다.

1950년 전쟁으로 이 땅에선 수많은 인구이동이 있었습니다. 특히 1.4 후퇴 때에 엄청난 수의 피난민이 남쪽으로 내려왔습니다. 또 전쟁 중에 양측 진영의 포로가 된 사람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탈북자로 인정되지 않았습니다.

전쟁 전까지 기록되던 탈북 집계는 1953년 7월 27일 종전이 된 뒤 다시 기록됐습니다. 전후 첫 탈북자는 1953년 7월 31일 휴전선 중동부 전선 비무장지대를 넘어온 북한군 안창식 대위입니다. 이때부터 귀순 용사라는 말이 사용돼 안창식 대위는 한국의 제1호 귀순 용사로 꼽힙니다.

함남 갑산군 출신인 안 대위는 북한군 15사단 사령부에 근무하다가 월남했는데, 이후 49년 동안 한국 국민으로 살다가 2002년 지병으로 사망했습니다.

참고로 제2호 귀순 용사는 1953년 9월 21일 미그 15기를 몰고 귀순한 노금석 상위였습니다. 당시 미그 15기는 공산 진영의 최신 전투기로 그 비밀이 알려지지 않았던 시기였습니다. 미국은 미그 15기를 몰고 귀순하면 10만 달러와 함께 미국 시민권 보장을 내걸고 선전했는데, 노 상위는 이런 사실을 모르고 넘어왔습니다.

그래도 미국은 약속을 지켰고, 노 상위는 미국으로 건너가 방산 관련 연구소와 대학교수 등을 지내다가 지난해 1월 91세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그는 아메리칸드림을 이룬 탈북민 1호라고 볼 수 있는데, 지금도 미 공군 국립박물관엔 그가 타고 온 미그기가 전시돼 있습니다.

1962년 4월에 ‘국가유공자 및 월남 귀순자 특별 원호법’이 제정되면서 그 이전까지 제각각이던 귀순 용사에 대한 처우가 통일됐습니다. 그런데 뭘 특별히 많이 주지는 않았습니다.

1979년 1월엔 월남 귀순 용사 특별보상법이 실시됐는데 이때부터 귀순 용사들은 엄청난 보상을 받았습니다. 귀순 용사는 체제 우월성을 재확인하며 반공 의지를 다지는 계기가 됐는데, 1980년대엔 결혼 순서가 ‘의사, 변호사 다음으로 귀순 용사’라는 말까지 나왔습니다. 많은 보상금은 물론 서울 중심부에 30평대 아파트를 주고 좋은 직업에, 취직도 보장했습니다.

그러다가 소련의 붕괴 이후 러시아 벌목공들이 많이 넘어오자 정부는 1993년 6월 귀순 북한동포보호법을 제정했는데, 이때부터 귀순자를 국가 유공자에서 생활 능력이 결여된 생활보호 대상자로 대우해 주었고, 정착금도 매우 적게 주었습니다.

그러다가 1997년에 북한이탈주민의 보호 및 정착지원에 관한 법률이 나오면서 정착금도 올랐습니다.

1997년 4월 20일 입국한 황장엽 노동당 비서는 815번째 입국자로 이름을 올렸습니다.

1998년 말까지 입국한 탈북민은 947명이었는데, 이중 여성의 비율은 12.2%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2024년 현재 탈북민 중 72%가 여성입니다. 지역별로는 함북 출신이 약 2만 명, 양강도 출신이 약 6천 명입니다.

탈북민은 2006년 2월에 1만 명을 넘겼는데, 이는 집계가 시작된 지 58년 만입니다. 그리고 4년 뒤인 2010년 11월 2만 명을 넘겼고, 다시 5년 뒤인 2016년 11월에 3만 명을 넘겼습니다. 최근 탈북에 어려운 사정들이 중첩되면서 2023년 입국자는 196명에 그쳤습니다. 언제 탈북민 4만 명 시대가 올까요. 그 전에 남북통일이 되는 날이 먼저 오길 간절히 바랍니다. 지금까지 서울에서 주성하였습니다.

** 이 칼럼 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

에디터 양성원 웹팀 한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