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성하의 서울살이] 서울시민이 된 북한 6.25전쟁 선봉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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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북녘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는 최근 일주일 동안 미국 휴스턴에 강연을 다녀왔습니다. 코로나 이후 2년 반 만에 저도 처음 해외에 나갔다 오는 것인데, 감개무량했습니다.

미국 가는 도중에 하와이에 들려 진주만 기념관에도 가고, 와이키키라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바닷가 해변에서 수영도 했습니다. 하와이 하면 북한에서도 널리 퍼진 ‘알로하오에’라는 노래가 떠오르죠. 하와이 백사장에서 그 노래를 나직이 불러봤습니다. 북한에서 태어난 제가 하와이 구경까지 하다니요. 김정은도 보지 못한 하와이를 제가 대신 봤습니다.

하와이 진주만 박물관에는 2차 세계대전 때 일제의 항복 서류를 받아냈던 6만 톤급 전함 미주리호가 떠 있습니다. 6.25전쟁 때 인천과 흥남에 함포를 쐈던 배로 한반도와도 밀접히 관련이 있습니다. 수백 kg짜리 포탄 하나가 제 키만 했는데, 이런 포탄이 떨어지면 수영장 하나씩 만들어졌을 듯합니다. 이런 포탄을 쏘는 포가 9개나 있는데, 아마 인천상륙작전 때 월미도 등에 배치된 북한군은 포탄의 위력에 전의를 상실했을 것 같습니다. 구경 400밀리짜리 포탄이 날아오면 세상에 그런 지옥이 어디 있겠습니까.

미주리호가 너무 커서도 놀랐지만, 80년 전에 이런 대단한 전함을 만들어낸 미국의 힘에 또 한 번 놀랐습니다. 거대한 배가 얼마나 정교하게 설계됐는지 북한은 지금도 죽었다 깨도 못 만들 것 같고, 지금 미주리호가 다시 동해에 간다고 해도 북한 해군 전체가 달라붙어도 절대 격침시킬 수 없을 겁니다.

전함 얘기로 시작했는데, 방송을 녹음하는 날이 마침 6.25전쟁 발발 72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아직도 북에선 6.25전쟁을 남쪽에서 쳐들어 올라간 것에 대한 반격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이 많을 건데, 그건 폐쇄적인 사회에서 어쩔 수 없이 교육받은 결과라고 봅니다. 제가 남쪽에 와보니 북한이 사람들에게 6.25전쟁에 대해 정말 많은 거짓말을 가르쳤더군요. 6.25전쟁 발발 72주년에 제가 그런 거짓말 중 어떤 거짓말의 실체를 하나 들려드릴까 하다가 오늘은 그런 얘기보다는 남과 북에서 영웅 대접을 받아야 마땅할 한 사람의 이야기를 할까 합니다. 동란의 시기를 살아온 한 인간에 대한 이야기이죠.

북한에서 105땅크 사단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겁니다. 6.25전쟁 때 낙동강까지 진격로를 개척한 땅크 부대인데, 가장 상징적인 번호가 105호 땅크였죠. 저희가 어렸을 때 땅크를 그리라고 하면 무조건 T34땅크에 105라고 적었습니다. 북한은 6.25전쟁을 일으키기 위해서 소련에서 땅크를 242대나 넘겨받았습니다. 여기에 자주포 176대까지 포함해 도합 418대의 기계화 장비를 넘겨받아 9전차 여단을 창설했습니다. 반면 한국은 미군이 철수해 병력 숫자도 북한의 절반에 불과한데다 땅크도 단 한대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북한 땅크가 진격해오자 처음 보는 괴물에 당황했습니다.

이 9전차여단이 서울을 함락시키자 김일성이 흡족해서 105땅크 사단으로 승격시켰죠. 초기 파죽지세로 북한군 공격부대의 앞장에 서서 진격한 사람 중에는 여단의 1대대장 김영 소좌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북한은 땅크를 넘겨받으면서 두 명을 소련에 보내 땅크 전술에 대해 공부하게 했는데, 그중 한 명이 김영 소좌였습니다. 여단장이 유경수이긴 했지만, 산에서 빨치산만 한 사람이 기계화 전술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러나 김영 소좌는 땅크 여단에서 가장 최신 전법을 배운 전문가이기 때문에 1대대장으로 진격의 앞장에 섰는데, 서울 함락의 최고 영웅이었습니다.

북한군 땅크부대가 서울로 들어오자 한국군은 수유리라는 곳에 최종 방어선을 구축했고, 각종 포부대도 집결시켰습니다. 북한군 땅크부대가 쉽게 돌파하기 어려운 방어선이었습니다. 그러자 이 김영 소좌가 단 두 대를 몰고 방어선을 에둘러 서울 시내에 들어와 중앙청 앞에 나타났습니다. 국군 수뇌는 방어선이 뚫린 줄로 착각하고 한강 철교를 폭파하고 후퇴했습니다. 김영 소좌는 중앙청에 북한 깃발을 올린 영웅이자, 서울 함락의 가장 큰 공신이었죠. 이후 김영 소좌는 오산에서 미군 부대와 첫 교전을 했을 때도, 대전에서 미군 2사단을 격파할 때도 늘 선두에 섰습니다. 낙동강까지 남진의 최선두를 지킨 북한의 땅크 영웅이었죠.

하지만 낙동강까지 가니 전세가 역전됐습니다. 보급로가 길어 땅크 연료가 도달하기 어려워진 데다, 그때쯤에 미국 전차부대와 폭격기들이 투입됐습니다. 도로를 따라 내려오는 북한군 땅크는 폭격기의 밥이었습니다. 사실상 북한 땅크 부대는 낙동강에서 다 괴멸됐다고 볼 수 있습니다. 김영 소좌는 북한군이 더는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뻔히 죽음의 길이 보이는데 계속 공격 명령을 내리는 무지한 김일성의 지시에 반발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땅크가 다 파괴되자 낙동강 전선에서 미군에 투항했습니다.

이후 그는 자유 진영의 편에 서서 미군 소속 첩보부대에 들어가 전쟁이 끝날 때까지 활약했는데 황해도 지구대장으로 구월산 등에 첩보부대를 거느리고 들어가 활약했다고 합니다. 3개월을 인민군 소좌로, 나머지 거의 3년을 한국의 첩보부대 지구대장으로 산 것이죠. 한국군의 활약만 놓고 봐도 충분히 영웅감입니다. 그러나 그는 어느 곳에서도 영웅 칭호를 받지 못했습니다. 김영 소좌는 한 기업의 사장으로 은퇴 이후 자신이 서울로 진격할 때 강력한 방어선에 막혔던 수유리라는 곳에서 식당을 차리고 식당 사장으로 조용히 살았습니다. 2000년 초반까지도 식당을 운영했는데, 손님들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 전혀 몰랐다고 합니다. 지금 북한에서 선전하는 중앙청에 첫 공화국기를 날렸다는 인물은 거짓말이고, 진짜 영웅은 서울 시민이 돼서 50년 넘게 산 것입니다. 이렇게 6.25전쟁을 맞아 남과 북에서 영웅으로 산 105땅크 사단 선봉장 김영 소좌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서울에서 주성하였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주성하, 에디터 이현주,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