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북녘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이달 8일이 북에서는 김일성 사망 25주기 행사를 하는 날이었습니다. 김일성 사망 당일 기억이 어제 일처럼 떠오르는데 벌써 25년이나 지났군요. 지금까지 제가 벌써 25년이나 더 산 것이겠죠. 인생이 참 빨리도 갑니다. 지금 30살쯤 되는 청년들은 아마 1994년의 기억도, 김일성에 대한 기억도 없을 겁니다. 이렇게 또 세대가 흘러가는 겁니다.
올해 7월 8일 북에서 김일성 사망 추모행사를 하는 동안, 저는 이날 경기도 안성에 있었습니다. 바로 이날이 탈북민들이 한국에 오면 사회에 나오기 전 교육을 받으며 석 달간 머무르는 하나원 창립 20주년이 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하나원은 1999년 7월 8일에 만들어졌습니다. 북에서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을 거치면서 탈북해 한국에 오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한국 정부에서 이들을 위해 정착 교육시설이 필요하다고 만든 겁니다. 당시만 해도 한국에 오는 사람의 숫자가 1년에 몇 십 명 정도였습니다. 그때는 한국으로 오고 싶어도 오는 통로가 없었을 때입니다.
저는 하나원이 만들어진지 3년 좀 안돼서 한국에 왔습니다. 제가 왔을 때부터 한국으로 오는 탈북자가 한달에 100명이 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비로써 몽골 루트, 루트라는 것이 통로라는 뜻인데, 즉 중국에서 몽골 국경을 넘어 사막을 통해 울란바토르로 가면 한국으로 오는 길이 만들어진 겁니다. 그리고 동남아를 통해 오는 길도 2001년 말 쯤부터 사람들이 새롭게 뚫기 시작했습니다.
몽골 루트는 위험해서 지금은 거의 사용하지 않고, 대다수 탈북민이 동남아를 거쳐 오지만 아무튼 그때 몽골 루트만해도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고비 사막을 넘어 가다 길을 잃고 숨진 사람들도 있었지만, 이 길로 몇 천 명이 왔습니다.
엊그제 2013년에 한국에 온 탈북 청년이 제게 몽골 다녀왔다며 몽골 술 한 병을 들고 찾아왔더군요. 지금 명문대 학생인데, 짬만 나면 외국에 나가 돌아다닙니다. 남들은 발전된 나라와 번화한 도시를 가지만 얘는 오지 탐방을 좋아해서 저번에는 알래스카를 가더니 이번에는 몽골 고비사막에 가서 닷새나 사막 횡단 등을 하면 보내고 왔습니다. 물론 사막을 횡단하는 차를 타고, 천막 안에 들어가자고 먹을 것도 충분히 가지고 하는 여행입니다. 헌데 저는 고비 사막에서 그가 찍어온 사진을 보면서 이 사막에서 10년 전에 헤매던 우리 탈북 동포들을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중국에서 오는 사람들이 탈북 브로커와 접선해서 동남아로 옵니다. 이 루트는 이미 북한 당국도 잘 알고 있어 비밀이 아닌데, 연변에 나오면 탈북 브로커가 심양쯤까지 넘기고 빠지고, 새 브로커가 운남성까지 데려가고 하는 식으로 이어달리기 방식으로 중국을 가로질러 이동합니다. 그리고 운남성 쪽에서 캄보디아나 라오스로 들어갔다가 브로커의 안내를 받아 메콩강을 건너 태국, 즉 타이로 넘어가면 이때는 성공한 것이 됩니다. 한국 대사관에서 접수해 북송되지 않고 한국으로 데려 오기 때문입니다.
김정은 체제 들어서 이런 루트를 적발하기 위해 북한 보위부가 공작 많이 합니다. 요원을 탈북민으로 가장해 브로커 신상을 알아낸 뒤 일행을 통째로 잡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요원이 보위부 직원일 수도 있는데, 대개는 같은 탈북자에게 접근해 북에 있는 가족을 수용소에 보낸다고 협박해 정보를 넘기게 하는 방식을 많이 씁니다. 요즘엔 오는 탈북자의 80% 이상이 여성인데, 여성은 가족애가 강하니 협박이 잘 먹힙니다. 최근 몇 달 동안 또 한국으로 오던 일행이 여럿 잡혔네요. 아마 요즘 북한에서 탈북민 잡느라 또 신경 많이 쓰나 봅니다. 브로커들이란 것이 한번 이동할 때마다 차를 빌리는 등 돈을 많이 써야 하니 한두 명씩 데려오지 못하고 사람들 열명 미만으로 모아서 이동시키는데, 그러다보니 체포되면 다 잡힙니다. 돈은 많이 들겠지만 더 주고 될 수록 소규모, 더 좋으면 나 혼자 움직이게 하면 안전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누구는 한국행에 성공하고, 누구는 오다 잡혀 수용소에 끌려가 목숨을 잃습니다. 어떤 사람이 성공하고 어떤 사람이 실패하는지 이게 딱 분석할 순 없습니다. 확률적으로 돈을 많이 쓰면 성공 확률이 조금 더 높아지긴 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안전해지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이건 전쟁에 나가서 누가 죽고, 누가 사는가 하는 것과 비슷한 이치입니다. 누구는 맨 앞에서 돌격해도 살고, 누구는 맨 뒤에 서 있어도 포탄 맞고 죽는 그런 것과 비슷한 겁니다. 다 제 명이고, 운명이다 이런 말을 하지만, 그렇게 보면 또 팔자를 믿는 사람처럼 생각되실까봐 함부로 말하긴 어려운 일입니다.
아무튼 저는 살아서 한국에 온, 그것도 한국행 루트가 맨 먼저 만들어질 때 온 경우에 해당합니다. 저는 몽골이나 동남아로 오지 않고 중국의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왔습니다. 그러다보니 다른 사람들보다 4~5배 더 돈을 많이 썼습니다. 지금은 이 방법이 또 알려져서 없어졌습니다. 저는 중국에 있을 때 매일 라디오로 바로 이 방송, 자유아시아방송을 들었습니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들으며 한국으로 가려는 꿈을 키웠고 성공했습니다.
한국 사회에서도 나름 성공한 탈북자라고 8일 하나원 창립 20주년 행사에 초대돼 가서, 점심시간에 축사까지 했습니다. 그때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한국에 도착했을 때 제 탈북 순서가 2000 몇 번째였습니다. 너무 늦게 왔다 이렇게 생각했는데, 한국에 온 탈북자가 이제는 3만 3000명이나 됩니다. 지금 돌아보면 저는 매우 빨리 온 행운아였습니다.”
저는 하나원 창립 20주년 행사에서 하나원 30주년 행사는 없기를 바랬습니다. 10년 안에 더는 우리 북한 동포들이 목숨을 걸고 탈북하는 날이 사라지길 바란 것입니다. 제 꿈이 꼭 이뤄지길 바라며, 지금까지 서울에서 주성하였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