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성하의 서울살이] 북한 수해, 구성시의 비밀 갱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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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북녘 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김정은이 평북 지역을 강타한 대홍수 피해를 자신에 대한 우상숭배를 만드는 계기로 열심히 활용하고 있습니다.

숱한 사람들이 피해를 본 지역을 고무보트를 타고 가서 둘러보고, 이재민들에게 평양에서 머물게 하는 등 선전 효과를 극대화하려 하고 있습니다.

‘인민의 고통과 함께하는 자애로운 어버이’ 이런 생각을 주입하려는가 본데, 진짜 능력 있는 지도자라면 애초에 자연재해 피해를 최소화하게 할 겁니다. 언제까지 대책 없이 맨날 피해 보고, 김정은이 헐레벌떡 뛰어와서 인자한 척 뒷수습하는 모습을 봐야 합니까.

김정은의 선전은 신의주, 의주 지역에 집중돼 있는데, 이번 홍수로 큰 피해를 본 지역은 이곳뿐만이 아닙니다.

자강도는 홍수와 산사태로 철도와 도로가 다 막혀 20일 넘게 교통이 막혔다가 18일이 돼서야 일부 구간이 복구됐습니다. 김정은은 그나마 신의주까진 철도나 도로로 갈 수 있었으니 거기서 연극을 했겠지만, 자강도와 평북 내륙 지역은 접근도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철길, 도로를 열었다면, 자재를 싣고 가 복구해야 하는 전력망은 여전히 복구를 못 하고 있고, 이쪽의 전기 공급은 차단됐다고 봐야 하겠죠.

특히 피해가 가장 클 것으로 예상되는 평북 산간 지역은 아무 소식도 전해지지 않고 깜깜무소식입니다.

가령 대홍수가 발생한 7월 27일, 신의주 하루 강수량은 126㎜였는데 평북 중심의 구성시엔 228㎜가 내렸습니다.

이번에 기록적인 강수량을 기록한 지역은 신통히도 군수산업이 몰려 있는 곳들입니다.

구성에도 북한 군수공업의 핵심인 구성 공작기계공장, 유일한 탄약공장인 95호공장, 군복 생산의 중추인 구성 방직공장과 핵시설, 비행장, 전자전연구소 등이 있습니다.

구성 시내는 고려 시기 귀주대첩이 벌어진 장소로 두 개의 강과 여러 골짜기가 합류하는 곳에 위치해 있습니다.

그래서 거란군 10만 명이 배수진을 쳤다가 몰살당한 뒤 강감찬 장군이 수공전을 벌였다, 이런 설화도 나온 것입니다. 인공위성 사진으로 보면 골짜기들을 따라 철길이 놓여있고, 철길이 끝나는 지점에 군수공장 갱도 입구들이 보입니다.

북한 언론에는 민둥산들로 둘러싸여 기록적 폭우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 구성이나 인근 주요 군수산업 지역에 대한 언급은 전무합니다.

그런데 구성에는 군수공장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주 중요한 비밀 갱도가 또 있습니다. 어떤 곳이냐. 바로 여러분들의 운명을 좌우하는 출신성분 문건들의 원본들이 숨겨져 있는 곳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출신성분이라는 굴레를 써야 하는 북한의 악명 높은 주민등록제도는 이미 잘 알려져 있습니다. 자신이 왜 농민이나 광부로 평생 살아야 하는지 이유도 모르는 데다 자기 뒤에 달린 서류를 전혀 볼 수 없습니다.

내 문건에는 빨간딱지가 붙어있나 보다 그렇게 생각하고 살 뿐이지만, 도대체 어떤 기록이 달려있는지 알 수가 없죠. 여러분들이 볼 수 없는 그 문건의 원본이 구성의 갱도에 보관돼 있습니다.

물론 북한 각 지역 인민보안서(경찰서)에도 주민등록 문건들이 보관돼 있습니다. 보안서 주민등록과가 문건들을 관리합니다. 그런데 지역 보안서의 주민등록 서류는 원본에 기초한 필사본입니다.

인민보안서에서 근무하며 주민등록 문건을 직접 관리했던 탈북민에 따르면 북한의 출신 성분은 10년 전 기준으로 ‘기본 군중’과 ‘복잡한 계층’, 두 부류로 갈린다고 합니다.

과거엔 ‘적대계급 잔여분자’라는 출신 성분도 있었던 것 같지만, 이후 이를 복잡한 계층으로 포함시킨 것으로 보입니다.

주민 기록은 가로·세로가 약 15㎝·25㎝인 100페이지 분량의 책에 할아버지부터 시작해 8촌까지가 수기로 족보처럼 기록돼 있습니다.

첫 페이지엔 사진과 생년월일, 출신성분, 사회성분 등이 기록돼 있는데, 출신성분 아래에 다시 종교인, 교화 출소자 등과 같은 수십 개 세부 분류가 적혀 있습니다. 각 페이지 맨 아래엔 경력을 진술한 확인자 다섯 명과 검증을 책임진 요해지도원까지 손도장이 모두 6개 찍혀 있습니다.

이 탈북민의 증언에서 흥미로운 점은 문건엔 한국 친척의 행적까지 기록됐다는 것입니다. 가령 ‘사촌형 아무개는 괴뢰군 대대장을 하다가 몇 년에 전역해 몇 년에 미국 어느 도시에 가족과 함께 이민을 갔다’는 식입니다. 어떻게 이런 것까지 파악하고 있는지 본인도 놀랄 정도였다고 하는데, 다만 한국 가족의 행적은 1990년 이전에만 국한돼 있고 1990년 이후의 기록은 수많은 서류에서도 본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1990년 이전까진 북한이 간첩을 통해 남쪽 주민등록 시스템을 자유롭게 봤지만 그 이후엔 정보망을 잃었다고 볼 수 있겠죠.

주민 문건은 1년에 한 번씩 수정되는데, 뭔가 이상하거나 새로운 증언이 추가되면 비밀 열람권을 가진 극소수 담당자가 구성에 찾아가 원본과 대조해 본다고 합니다.

구성 갱도의 원본 서류들은 해방 이후부터 보관된 것이라 누런 종이들이 태반이라고 합니다. 쥐면 부스러질 것 같은 그 종이들이 바로 북한의 신분 시스템을 지탱시키는 핵심이기도 합니다.

북한은 김일성이 빨치산 시절에 친일조직인 ‘민생단’ 관련 문건들을 불태워 연루 혐의로 고통받던 숱한 사람들이 충성하게 됐다고 기회가 날 때마다 선전해 왔습니다. 하지만 진실은 그 반대로 김일성은 인간을 낙인찍는 문서를 너무 좋아했던 것입니다.

임진왜란 때 왕이 도망가자마자 경복궁에 쳐들어간 사람들은 노비문서부터 태웠습니다. 김정은 체제가 붕괴되면 인민이 맨 먼저 달려가 불 질러 버릴 곳도 ‘현대판 노비문서’인 주민등록문건 보관소일 것입니다.

구성의 물폭탄 소식을 듣자마자 군수공장보단 제일 먼저 주민 서류 보관 갱도가 떠올랐습니다. 그곳이 홍수에 잠기거나 산사태로 붕괴됐다면 김정은에겐 가장 뼈아픈, 복구 불가한 피해가 될 것입니다. 제발, 정말로 그렇게 됐길 간절히 바랍니다. 지금까지 서울에서 주성하였습니다.

** 이 칼럼 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

에디터 이현주, 웹편집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