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성하의 서울살이] 북한이 패배를 인정한 춘천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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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북녘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 9.9절 행사를 치르게 되네요. 이번 행사에서도 또 열병식이 진행되고, 그 ‘무적의 혁명무력’을 다시 거품 물고 칭송하겠군요.

그런데 북한이 겪은 유일한 전쟁인 6.25 전쟁은 사실 북한군이 아닌 중공군이 했습니다. 낙동강 전선에서 밀린 북한은 줄행랑을 치느라 병력도 다 잃었는데, 중국이 누적 인원 180만 명을 파병해서 대신 싸웠습니다.

북한군의 역할은 낙동강 진격까지였습니다. 낙동강에서 후퇴를 하게 만든 것이 인천상륙작전이었고요. 73년 전인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이 개시됐습니다. 7만 5000여 명의 병력에 261척의 해군 함정이 투입됐는데, 이 작전으로 대한민국은 풍전등화의 위기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럼에도 북한은 인천의 패배를 절대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오히려 인천 월미도는 북한에서 ‘영웅의 섬’으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월미도를 지키고 있던 76mm 포 단 4문이 5만 대군과 수백 척의 군함, 1000여 대의 비행기와 맞서 3일이나 섬을 사수하는 전설급 활약을 했고, 구축함 등 적함 13척을 격침·격파하고 수백 명의 적을 죽였다고 선전하고 있죠. “월미도의 영웅들을 따라 배우자”는 지금도 북한에서 널리 활용되는 선동구호입니다.

그래서 북한 주민들은 월미도에서 북한군 수백 명이 상륙작전 개시 단 수십 분 만에 모두 죽거나 항복했으며, 상륙부대는 전사 1명과 부상 22명이라는 경미한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월미도에 주둔했던 해안포 중대와 보병 대대는 함포 사격 때 갱도에 들어갔다가 입구가 무너져 태반이 죽었습니다.

북한의 6.25 전쟁사는 월미도처럼 황당한 거짓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북한 전쟁기념관에는 어뢰정 단 4척으로 미군 1만 7,000톤급 중순양함 ‘빨찌모르’를 격침시키고 1만 2,000톤급 경순양함을 격파했다는 ‘영웅’이나 매복 공격으로 미 육군 제8군 사령관 윌튼 워커 중장과 한 개 중대를 전멸시켰다는 ‘영웅’이 자랑스럽게 전시돼 있습니다. 전쟁 며칠 만에 미군 중순양함이 왜 동해에 와서 한가롭게 어촌이나 폭격하고 있겠습니까. 상식이 있다면 믿을 수가 없는 얘기죠. 미군의 중순양함 ‘빨찌모르’는 한국에 온 적도 없습니다. 워커 중장은 한국군 차량과 부딪쳐 교통사고로 죽었고요. 이처럼 북한은 전혀 있지도 않은 사실을 새빨갛게 지어내는 데 있어 선수입니다.

이렇게 거짓말 지어내기를 밥 먹듯 하는 북한이 무려 세 개 대대가 패퇴했다는 것을 인정한 전투가 있습니다. 졌다는 얘기를 극히 싫어하는 북한이 대대급 병력의 몰살을 인정한 것은 이것이 아마 처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는 김일성을 우상화하는, 33편의 장편소설로 구성된 ‘불멸의 역사’ 시리즈 중 1950년 여름을 배경으로 한 ‘50년 여름’이라는 소설에 등장합니다. 불멸의 역사 33편에 나오는 김일성은 제갈량 이상급의 천재죠. 몇 수 앞을 내다보니 싸우면 싸우는 대로 이기고, 북한 간부들은 머리를 달고 살 필요도 없습니다. 김일성이 시키는 대로만 하면 늘 이기고, 늘 대단한 성과가 나오니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소설에서도 북한이 패배를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전투가 바로 6.25개전 초기의 벌어졌던 춘천 전투입니다. 소설은 이렇게 묘사하죠.

“보이지 않는 수천 수만 발의 탄알의 소나기는 단 몇 분 동안에 대대를 땅에 쓸어 눕혔다… 다리를 건너간 역량은 한 개 중대 밖에 못 되였다. 뒤따르던 두 번째 대대도 역시 같은 비극적 정황 속에 돌진하였다…”

소설은 공격을 저지시킨 것은 춘천 봉의산을 방어하는 ‘괴뢰 6사’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춘천 공격을 담당했다는 북한군 52사의 역할에 대해 소설은 “거의 단독으로 전선 중부를 담당하면서 주타격 전선의 좌익인접을 보장하게 되어 있었고 동시에 적으로 하여금 아군의 주타격 방향을 서부가 아니라 중부로 오인하게끔 하는 사명도 수행해야 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사단이 방어선을 뚫지 못하자 민족 보위상 최용건은 “52사가 지연되면 서울작전안은 수정돼야 한다”며 춘천에 직접 와서 김일성과 상의 끝에 사단장을 해임합니다.

이건 사실입니다. 춘천 전투에서 2사단의 절반 병력을 잃었고, 결국 북한은 2군단장 김광협을 해임하고 무정을 새로 군단장에 임명했으며 2사단장 이청송은 최현으로, 7사단장 전우는 최충국으로 교체했습니다. 전쟁 시작 며칠 만에 군단 지휘관을 다 교체했다는 것은 김일성이 이 패전으로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는가를 잘 보여줍니다.

‘불멸의 역사’ 집필을 담당한 작가들은 북한 최고의 작가들이며, 노동당 비밀문서도 볼 수 있습니다. 흰 것도 붉다고 주장할 사람들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 것이 춘천의 패배입니다.

실제로 춘천을 방어하던 6사단은 6.25전쟁 발발 초기 춘천을 하루 만에 점령하고, 3일 뒤엔 수원을 점령해 한국군 배후를 차단하려던 북한군 2군단의 공격을 닷새나 막아냈습니다. 배후 포위망 형성에 차질을 빚은 북한은 결국 서울에서 3일을 허비했습니다.

이 3일이 대한민국을 살렸습니다. 북한이 계획대로 밀고 내려왔다면 국군은 재정비를 할 시간적 여유도 없이 쫓겼을 것이고, 낙동강 방어선이나 인천상륙작전도 없었을 것입니다. ‘3일의 미스터리’에 대해 한강 철교 폭파 때문이라는 설, 김일성이 남로당 폭동을 기다렸다는 설 등이 여전히 있지만, 소설 50년 여름에선 중부 전선을 제때 뚫지 못한 것으로 원인을 밝히고 있습니다.

춘천 전투의 한국군 지휘관은 김종오 6사단장이었습니다. 6.25 전쟁의 대표적 영웅이고, 그가 몇 년 뒤에 사단장으로 지휘한 백마고지전투는 중공군이 유일하게 패배를 인정한 전투였습니다. 여러분들은 춘천 전투란 말도 배우지 않고 있지만, 오늘 방송을 통해 6.25전쟁의 한 단면에 대한 진실이나마 알기를 바랍니다. 지금까지 서울에서 주성하였습니다.

** 이칼럼내용은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

에디터 양성원,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