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성하의 서울살이] 한만 남기고 사라지는 이산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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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북녘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한국 KBS 방송이 갖고 있는 세계 기록 중의 하나가 총 453시간 45분의 생방송 기록입니다. 세계 최장기간 연속 생방송 기록인데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습니다.

어떤 생방송이 그런 기록을 세웠을까요. 때는 1983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해 6월에 KBS는 6.25전쟁 관련 방송을 하다가 그럼 전쟁 때 헤어진 가족 몇 명을 출연시켜 가족 찾기 프로그램을 하나 해보면 어떨까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산가족 몇 가족을 출연시켰는데, 원래는 밤 10시 15분부터 2시간만 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방송이 나가고 1시간도 안 돼 사람들이 KBS 중앙홀에 몰려들어 가득 찼고, 도저히 방송을 끝낼 수 없어 새벽 2시 반까지 두 시간 더 연장했는데도 사람들이 계속 몰려왔습니다. 첫 4시간동안 무려 2000명이 넘게 KBS 건물로 몰려들었습니다.

그래서 방송국은 할 수 없이 내일도 하겠다고 약속할 수밖에 없었는데, 무려 5일간 밤낮으로 방송이 이뤄졌습니다. 최대 시청률은 무려 78%에 이르렀습니다. TV가 있는 사람들은 거의 다 봤다는 이야기죠. 이렇게 이어진 방송은 1983년 6월 30일부터 11월 14일까지 138일, 총 453시간 45분 동안 방송됐습니다.

이 기간 이산가족 5만 명이 KBS가 있는 여의도를 찾았고, 10만 건 이상의 문의가 접수됐으며, 1만 가족 이상이 가족을 찾았습니다.

이때만 해도 남쪽에는 가족의 생사도 모른 채 흩어져 사는 사람들이 많았고, 경찰 당국이 추산한 이산가족 수는 약 1,050만 명에 달했습니다. 1980년대 초 당시 대한민국 인구가 약 4,000만 명이었으니 네 명 중 한 명 꼴로 이산가족이 있었던 셈입니다.

그 전까지 이산가족은 돈이 좀 있으면 신문에 광고를 실을 순 있었지만, 너무 비싸서 일반적인 사람들은 가족을 찾는 것을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누구나 다 접할 수 있는 TV에서 이산가족의 사연이 소개되니 저마다 찾으려 나섰던 것입니다.

방송 기간 늘 가슴이 미어지는 사연이 화면에 흘렀습니다. 출연자들이 기절하고, 아나운서들의 눈물이 줄줄 흐르는 시간들이 이어졌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한국은 북한에도 이산가족 상봉을 제안했고, 결국 1985년 제1차 남북이산가족 상봉이 성사됐습니다. 당시 저는 어린 나이였지만, 나이 든 이산가족이 서로 부둥켜 안고 눈물 흘리던 장면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이후 30년 동안 남북관계가 좋으면 종종 이산가족 상봉이 이뤄졌는데, 2018년 8월 15일 금강산에서 이뤄진 뒤 지금까지 더 이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6.25전쟁이 끝나고도 벌써 69년이 지났습니다. 이젠 살아있는 직계 이산가족도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지금 한국에는 80~90대 이산가족이 4만 명이 있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지만 최근 한 달 사이에만 약 400여 명이 사망했습니다.

정말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그래서 한국 정부는 이달 8일 북한에 이산가족 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위한 남북 당국 회담을 공식 제안했습니다. 이산가족 문제는 시급한 순수 인도적 사안인 만큼 정치·군사적 상황과 분리해서 조속히 해결하자, 소수 인원의 일회성 상봉으로는 부족하니 한꺼번에 만나게 하자고 제안했습니다. 하지만 북한은 이런 제안에 아무런 반응도 내놓지 않고 있습니다.

저는 이산가족 상봉 문제만 봐도 북한이 얼마나 나쁜 체제인지 스스로 증명하고 있다고 봅니다. 헤어진 혈육이 서로 만나겠다고 하는데 북한은 무서워서 그걸 못합니다.

왜냐면 북한 당국이 볼 때 이산가족을 다른 말로 풀이하면 적대계층이기 때문입니다. 출신성분을 중시하는 북한에서 수백 만 이산가족 중 99% 이상은 적대계급으로 분류돼 6·25전쟁 이후 60년 넘게 신음했습니다.

월남자 가족이 어떻게 박해 받았는지는 여러분들도 잘 아시죠. 간부 승진은 물론이고 좋은 대학에 진학할 수도 없고, 죽어도 벗을 수 없는 신분의 굴레를 쓴 채 농촌과 광산 등 가장 어렵고 힘든 곳에서 평생 감시 속에 살아야 했습니다. 인민군으로 참전해 싸웠거나 또는 공산주의를 동경해 북한으로 간 월북자도 과학이나 예술 분야에 종사한 소수만이 계속 이용가치를 인정받았을 뿐 다른 사람들의 신세는 월남자와 큰 차이가 없었습니다. 김일성은 애당초 남쪽 출신들을 믿지 않았고 중앙당이나 보위부 같은 북한의 핵심 권부엔 이산가족이 없었습니다.

초기 남북 이산가족 상봉 때는 교수나 예술인 같은 북한이 내세울 만한 사람들이 나타났지만, 상봉 횟수가 점차 늘어날수록 고생으로 얼굴에 주름이 가득한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평양으로 불러서 잘 먹여 살도 찌우고 ‘때깔’도 바꾸려 애를 써도 평생의 고초가 몇 달 잘 먹는다고 바뀔 수는 없는 법이죠. 남쪽 가족을 만난 사람들은 “장군님의 은덕으로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똑같은 말만 되풀이 해 안타까웠습니다.

이산가족 상봉은 북한에 전혀 달가운 일이 아니긴 합니다. 호텔에서 잘 먹이고 남쪽 가족에게 줄 선물까지 챙겨주는 것은 적대계급에 어울리지 않는 대접이고, 남쪽 가족을 만나 돈과 선물을 받으면 그 자손들까지 남쪽을 선망하게 됩니다. 북한은 이산가족 상봉 규모가 커질수록 적대계층을 더 늘린다고 보고 아무리 남쪽에서 대규모 이산가족 상봉을 호소해봐야 받질 않습니다. 북한의 이산가족 상봉은 인륜의 문제가 아닌 대남 전술적 차원에서 일부 적대계층 에게 어쩔 수 없이 베푸는 호의일 따름입니다.

남쪽은 이산의 한을 품고 눈을 감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가는 세월을 붙들고 싶지만, 김정은은 남쪽을 동경하는 잠재적 체제 위험분자들인 이산가족이 빨리 죽기를 바랄지 모릅니다. 김일성의 6.25전쟁으로 생겨난 이산가족들에 대해 손자까지도 이를 해결할 생각이 없으니, 김 씨 일가가 우리 민족 앞에 지은 죄를 어찌 다 계산해야 할까요. 지금까지 서울에서 주성하였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주성하, 에디터:오중석, 웹팀: 이경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