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북녘 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이번 주 16일이 어머니날이라고 북한 매체들에서 열심히 선전하더군요. 그래도 북한과 같은 가부장적인 사회에선 어머니 날이라고 해서 집에서 아버지가 밥을 하는 건 아닐 겁니다. 자식의 생일상도 제대로 차려주지 못할 정도로 가난한 대다수 집에서야 어머니 날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김정은이 2012년에 집권해서 처음 만든 명절이 어머니 날인 것을 보면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컸던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자기 어머니가 누군지 공개도 못하고 있습니다.
김정은의 모친 고용희는 1952년 일본에서 태어나 다카다 히메라는 이름으로 살다가 1962년 북한으로 가족과 함께 들어갔습니다. 1970년대 초반에 그는 만수대예술단 무용 배우로 있다가 김정일의 눈에 들었습니다. 그때 김정일은 유부녀였던 당대의 유명 여배우 성혜림을 이혼시켜 김정남이란 아들도 낳았고, 또 김영숙이란 여성과 정식 결혼해 딸도 낳았던 상태였습니다. 그런데도 계속 예술인들을 집적거리다가 고용희가 또 마음에 들어 서평양역 앞에 있는 초대소에 숨겨놓고 연애를 했습니다.
김정일은 수많은 여성을 건드렸지만 결국 성혜림과 고용희에게만 애를 낳도록 허용했습니다. 김영숙이야 본처니까 어쩔 수 없이 살았지만 전혀 정은 없었던 것으로 보이고, 그나마 김정일이 곁에 둔 것이 성혜림과 고용희입니다. 그런데 성혜림은 서울 출신이고 고용희는 일본 출신입니다. 김정일이 왜 이런 여성들을 좋아했을까요. 김정일은 개인 소장고에 전세계 영화와 음악 다 갖다 놓고 혼자만 듣고 있는데, 북한에서 자란 여성들은 처음 듣는 세계 예술의 조류에 대해 무지하거든요. 성혜림과 연애할 때 김정일은 차 안에서 한국 노래를 틀어놓고 그와 함께 밤새 들었다고 합니다. 고용희와도 일본 예술을 놓고 계속 이야기가 통했겠죠.
인민들에겐 판에 박힌 음악을 강요하곤 자기는 세계의 좋은 것은 다 갖고 보고 들었습니다. 1980년대엔 TV만 틀면 15분짜리 동지애의 노래만 지겹게 나오고 가수도 최삼숙, 김옥선만 계속 나왔습니다. 아무튼 김정일은 고용희와 연애하다가 아들 둘에 딸 하나 낳았는데, 나중엔 또 피아니스트 출신인 김옥이와 눈이 맞았죠.
고용희가 자식들을 잘 키운 것도 아닙니다. 김정은은 열 살도 안 돼 어머니와 헤어져 1990년대를 스위스에서 보냈습니다. 이모 고영숙이 스위스로 건너가 김정철, 김정은, 김여정 자매를 키웠습니다. 김정일이 고용희의 자식들을 스위스에 보낸 것은 더 좋은 교육을 받으라는 의미는 아니고, 학교 갈 때가 됐는데 첩의 자식들을 들키면 손가락질 받을까봐 이들을 외국에 숨긴 것입니다.
김정은은 스위스에서 크다가 2000년대 좌우에 북에 왔는데 이번엔 엄마가 유방암에 걸려 병원을 오가다가 2004년에 죽었습니다. 그러니까 김정은은 사춘기에 어머니 사랑도 받지 못하고, 청년이 되자마자 어머니가 죽었습니다. 당연히 이럴 때는 어머니가 그립겠죠. 그래서 그리움을 담아 어머니 날을 만들었나본데, 올해 어머니 날에도 고용희 소리는 일절 없고 김정숙 이야기만 계속 나옵니다. 북한에서 천대를 하는 재포 출신이 바로 자기 어머니라고 하면 백두 혈통에 금이 간다고 생각해서 그런 것일까요.
저의 경우엔 북한과 어머니 날이란 단어를 듣자마자 떠오르는 것이 김철의 어머니 시입니다. 하도 교과서에 싣고 달달 외우게 해서 그런지 모르겠는데, 그게 아직 교과서에 있습니까.
김철 시인이 2008년에 75세로 사망했는데, 한국에 와서 보니 형이 유명한 화가로 한국에서 살더군요. 원래 이들 형제는 명천 출신인데, 형이 월남한 것이죠. 저는 ‘어머니’란 시가 어떻게 돼서 나오게 됐는지 잘 몰랐는데 남쪽에 와서 알게 됐습니다.
김철은 1950년대 작가학원을 1기로 졸업하고 기자생활을 하던 중 시베리아로 추방당한 러시아 장교와 독립군 출신 한인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 여성과 사랑에 빠지게 됐습니다. 이때 김철은 장애인 여성과 결혼한 상태였는데, 이른바 ‘부화사건’으로 사상투쟁회의에 올랐습니다. 중앙작가동맹에서 ‘본처와 이혼하면 출당시키겠다’고 하자 김철은 서슴없이 당원증을 내놓았다고 합니다. 이후 그는 혼혈 여성과 단천지구 광산으로 추방돼서 무려 21년이나 광산 노동자로 살았습니다.
가서 살아보니 얼마나 비참한 삶이겠습니까. 어느 순간부터 김철은 노동당에 아부하는 시를 계속 써서 올려 보냈는데, 그러다가 어머니란 시가 김정일의 눈에 띈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평양에 올라왔는데, 그 당당하던 김철이 혁명화를 하더니 김정일의 발바닥도 핥게 변했습니다. 그래서 김 씨 일가가 ‘혁명화’라는 명목으로 멀쩡한 사람을 오지로 쫓아내 죽을 고생을 시킨 뒤 ‘배려’니 ‘은덕’이나 하면서 다시 불러 올려 심복으로 길들이는가 봅니다. 그런데 김철의 어머니를 서울에서 보면 어이가 없어 웃음만 나옵니다.
“그 시선 한번 강토에 비끼면 황량하던 폐허에도 온갖 꽃이 만발하고 거인의 그 손길 창공을 가리키면 전설 속의 천리마 네 굽을 안고나는 어머니”라고 했는데 완전히 반대가 아닙니까. 뭘 잔뜩 벌여만 놓지만 완공을 못해 멀쩡하던 곳도 폐허로 만드는 게 북한이고, 발전소 하나 만드는 것도 40년씩 걸리는데 전설의 천리마 타령을 하니 정말 웃기는 일이죠.
“피도 숨결도 다 나누어주고 운명도 미래도 다 맡아 안아주며 바람도 비도 죽음까지도 다 막아나서 주는 우리들의 어머니”라고 했는데, 막아주긴 뭘 막아줍니까. 북한만큼 걸핏하면 사람 끌어가서 죽이는 곳이 또 어디 있습니까. 노동당은 정겨운 어머니가 아니라 세계가 치를 떨 정도로 끔찍한 살인자에 불과합니다.
이런 실정을 무시하고 어머니란 달콤한 말로 여러분들을 세뇌시키는 것을 보면, 그리고 그 세뇌가 아직도 먹힌다면 북한은 정말 답이 없는 곳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서울에서 주성하였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주성하, 에디터 오중석,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