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성하의 서울살이] 일본 해변에서 바라본 고향 하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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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북녘 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가 이달 초 일본에 5박6일간 다녀왔습니다. 휴가를 내고 일부러 간 것인데, 한국 와서부터 가고 싶었던 곳을 20년 만에 결국 갔습니다. 일본 홋카이도의 중심도시 삿포로까지 김포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2시간 반 날아가서 거기서부터 쭉 차로 하루에 4시간 정도씩 달려 니가타까지 갔습니다.

그러니까 일본 서북부 서쪽 해안 일주를 한 셈인데, 거기는 한국 관광객들도 잘 가지 않는 곳입니다. 그런데 왜 거기가 제가 꼭 가보고 싶었던 곳일까요.

그걸 설명하자면 좀 깁니다.

제 고향은 함경북도 청진 주변의 어촌 마을입니다. 약 50m 너비의 백사장이 끝나는 곳에 고향집이 있었습니다. 파도 소리를 자장가로 알고 자랐고, 매일 문을 열면 탁 트인 바다가 맞아주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저는 “이 바다 건너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게 늘 궁금했습니다.

크면서 세계지도를 통해 바다 건너에 일본이 있다는 것 정도는 알았지만 그 이상은 더 알 수가 없었습니다.

여름에 태풍이 오면 저의 피는 끓기 시작했습니다. 태풍이 지나간 뒤 해변엔 쓰레기가 가득했는데, 그런 날 아침이면 맨 먼저 바닷가 해변에 나가 천천히 걸으며 간밤 해변에 도착한 색다른 쓰레기를 주워봤습니다.

그것이 세상을 향한 어린 소년의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유일한 방법이었습니다. 남에겐 쓰레기일지라도 저에겐 바깥세상의 비밀을 푸는 퍼즐이기도 했습니다.

쓰레기는 일본에서 밀려온 것이 가장 많았고, 남조선에서 온 것도 있었습니다. 주로 빈 페트병, 캔 등이 많이 떠왔지만, 가끔은 지금까지도 기억나는 쓰레기도 주었습니다. 일본 슬리퍼 한 짝을 들고 “이런 건 왜 신고 다니지” 궁금했던 적도 있고, 의족 하나를 들고 어떻게 발에 붙이고 다닐까 한참 상상했던 적도 있습니다. 파란색 일제 플라스틱 파리채를 주어와 몇 년 잘 썼던 적도 있지요.

그 동네에서는 누구도 가르쳐 주지 않는 바다 건너 세상에서 매년 꼬박꼬박 건너오는 쓰레기들을 소년은 연애편지를 기다리는 심정으로 기다렸습니다. 커갈수록 해변에 앉아 건너편 세상을 상상하는 일도 많았습니다.

“언젠가는 꼭 가보리라” 그렇게 늘 마음 속에 결심을 품고 살았고, 결국 피 끓는 20대에 목숨 걸고 탈북했습니다. 중국과 북한에서 여섯 번이나 감옥을 옮겨 다녔어도 바깥세상을 향한 의지를 꺾지 않았습니다. 2002년 마침내 한국에 왔고, 하나원을 나와 4개월 뒤부터 기자가 돼 바쁘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내 고향 건너편엔 무엇이 있을까” 하는 궁금증은 늘 가슴 어딘가에 숨어있었습니다.

2005년에 구글어스라는 서비스가 시작됐습니다. 인터넷으로 세계 어느 곳이든 손금 보듯 내려다볼 수 있는 기능입니다. 이때 가장 먼저 한 일은 내 고향과 위도가 분초까지 똑같은 일본 해변을 찾는 것이었는데 찾아보니 그곳엔 검은 해변이 있었습니다.

어렸을 때 갈 수 있을 것이라고 꿈도 꾸지 못했던 그 해변에 서서, 이번엔 맞은편 고향을 바라보는 것이 오랜 세월 나의 최고의 소망이 됐습니다.

그리고 보름 전 드디어 그 꿈을 이뤘던 것입니다.

고향집과 정확하게 위도가 일치하는 해변은 콩알처럼 작고 검은 몽돌이 깔린, 사람이 접근하지 않는 외진 해변이었습니다. 그곳에 서서 바다 건너 고향 하늘을 바라볼 때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어렸을 땐 바다 건너 일본은 절대 갈 수 없는 곳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불가능하게 여겨졌던 꿈을 마침내 이뤘지만, 이번엔 바다 건너 고향이 갈 수 없는 곳이 됐습니다.

어찌하여 이 바다는 이렇게도 건너기 힘든 것이 됐을까요.

1,300년 전 발해인들은 열악한 목선으로도 일본을 오갔는데, 지금의 북한은 그 어떤 배를 타도 갈 수 없는 곳이 됐습니다.

발해인들이 타고 왔던 계절풍과 해류를 타고 부서진 북한 목선들만이 백골을 실은 채 일본 해안에 도착할 뿐입니다.

발해 사신 양태사는 계절풍을 기다리는 반년이 너무나 길어 ‘한밤의 다듬이 소리’라는 애달픈 시를 남겼고, 제가 북한에서 학교 다닐 때는 그게 교과서에도 나왔습니다. 그런데 니가타항에서 만경봉 호를 타고 떠난 10만 명 가까운 재일교포들은 반세기가 지나도록 다시 돌아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일본 서해에 머물렀던 엿새 동안 나는 점점 더 외부와 고립돼 가는 북한 동해의 도시와 마을들을 헤아릴 수 없이 떠올렸습니다. 그럼에도 북한 바닷가 마을 어디에선가 40년 전의 어린 나처럼, 외부 정보가 담긴 쓰레기를 들고 호기심에 반짝이는 두 눈으로 살펴보는 소년이 있을 것이라 믿었습니다.

검은 몽돌 해변에서 저는 “다시 저 건너에 가서 서리라”, 이런 새로운 각오를 다졌습니다. 어쩌다보니 저는 또 동해바다를 건너는 것이 목표인 인생을 살게 됐습니다. 물론 그것은 바다 건너 북한 인민들의 꿈이기도 할 것입니다. 누구나 김정은 체제가 붕괴되면 가난한 북한에 머물기보단 바다 건너 외국에 가길 원하겠죠.

같은 땅에서 태어난 우리가 같은 꿈을 꾸다가, 문뜩 그 꿈이 이뤄지는 날이 온다면, 저는 고향에 남 먼저 찾아가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습니다.

“저 바다 건너편엔 전기를 생산하는 풍력발전소 풍차가 가득한 아름다운 해변이 있더구나. 나는 한 평생을 바쳐 다녀왔지만, 이젠 너희들은 배를 타고 한나절 만에 갔다 오거라” 이렇게 말입니다.

그런 날이 오면 자동차보다 더 빠른 배를 타고 누구나 일본에 하루 만에 올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일본도 인구가 줄어들어 서쪽 해안은 아주 좋은 빈집들이 매우 많았습니다.

일본 마을은 고령화 돼서 노인들만 가득한데, 북한 젊은이들이 와서 간호만 해주어도 북한에서 1년 벌 돈을 한 달이면 벌 수 있습니다. 그렇게 돈을 벌어 북한에 보내주고, 그걸 받은 북한 가족들이 부유해지고, 그런 날이 저는 언젠가는 꼭 올 것이라고 믿습니다. 지금까지 서울에서 주성하였습니다.

** 이 칼럼 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

에디터 양성원, 웹팀 이경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