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안녕하세요. 지난 20여 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노동신문을 읽은 북한 전문가, 이현웅 안보통일연구회 수석연구위원과 함께합니다. 저는 진행을 맡은 오중석입니다.
오중석: 이현웅 위원님 안녕하세요.
이현웅: 안녕하세요.
오중석: 오늘은 어떤 기사를 살펴볼까요?
이현웅: 네. 2월19일자 2면에 수록된 “역사에 길이 빛날 2월의 선언”이라는 기사입니다. 김정일은 자기 아버지인 김일성의 독재권력을 구축하기 위해 1974년 2월 19일 ‘전국당 선전일군 강습회’에서 “온 사회를 김일성주의화 하기 위한 당 사상사업의 당면한 몇 가지 과업에 대하여”라는 글을 발표한바 있습니다. 여기에서 김정일은 황장엽이 공들여 작성한 ‘인간중심 주체사상’을 김일성이 만든 것으로 기정사실화하고 더 나아가 이를 ‘김일성주의’로 격상시켰습니다. 이 기사는 김정일의 생일을 기리는 올해 광명성절(2월 16일)을 ‘기념’하기 위해 김정일의 과거 통치이념 조작행위를 “새로운 이정표를 세운 역사적 사변”이라고 강변하며, 김정일 업적을 날조하는 ‘우상화 선전기사’입니다.
오중석: 북한 김일성은 ‘주체사상을 김일성주의’로 격상시키는 것에 대해 처음에는 ‘자신이 어떻게 맑스-레닌보다 더 낫다고 볼 수 있겠느냐’며 ‘김일성’ 이름을 붙이는 것을 반대했다는 말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김일성주의’에 관한 기사 내용을 좀더 구체적으로 짚어 주실까요?
이현웅: 네. 이 기사는 먼저 김정일이 김일성의 혁명사상을 체계화하여 ‘김일성주의’로 정식화 한 것을 찬양하는데 가장 큰 역점을 두고 있습니다. “수령이 창시한 혁명사상을 체계화, 정식화, 유일지도사상으로 제시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특출한 자질과 실력을 갖춘 위인만이 할 수 있는 력사적 위업”이라며 ‘김정일의 역사적 위인상 만들기’에 나서고 있습니다.
다음은 김정일이 주사체사상을 ‘김일성주의’로 선포한 이후 ‘이데올로기 독점권’을 장악하기 위해, 북한 사회를 ‘김일성주의’로 일색화해 온 각종 행태를 미화하고 있습니다. 지난 70년대는 북한이 사회주의 높은 단계로 발전해야 하는 시점이었는데, 마침 김정일이 “시대와 혁명발전의 요구를 깊이 통찰”하고 ‘김일성주의’를 “사람과 사회와 자연을 개조하여 인민대중의 자주성이 완전히 실현된 사회를 건설할 수 있는 혁명강령”으로 제시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970년 제5차 당대회에서 ‘주체사상’을 새로운 통치이념으로 공식 채택한 것도 “김정일의 수령에 대한 순결한 충정과 불면불휴의 사상이론 활동의 고귀한 결정체”라고 칭송하고 있습니다. 또한 김정일이 “온 사회의 김일성주의화를 당의 최고강령으로 선포”한 것은 “당과 혁명의 앞길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운 역사적 사변”이며, 이로써 “당과 국가건설, 무력과 경제문화건설 등 모든 분야에서 새로운 전환을 이룩하고 노동당시대의 일대 전성기를 열어나가는 역사의 분수령에 올라서게 되었다”며 김정일 미화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새로 추가한 ‘혁명적 수령관’으로 인해 “진보적 인류에게 사회주의 위업의 전도에 대한 신심을 안겨주고 자주성을 위한 인민대중의 혁명운동이 더욱 활력 있게 전진해나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기사는 사상적 측면에서 김정일에 대한 우상화를 김정은에게 직접적으로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대를 이어 갈수록, ‘김씨 일가’에 대한 우상화 강도가 심화되고 확장되어가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중석: 김정일이 황장엽의 ‘인간중심 주체사상’을 토대로 ‘김일성주의’를 조작하고 이것도 모자라 ‘온 사회의 김일성주의화’를 당의 최대강령으로 선포한 그 이유와 배경은 어디에 있다고 보는지, 말씀해 주실까요?
이현웅: 네, 먼저 김정일 입장에서 그 배경을 살펴보면, 김정일은 1964년 대학을 졸업하고 그 해 9월부터 당 조직지도부 지도원으로 당에 들어가 정치를 시작하였습니다. 2년 후인 1966년부터는 당 선전선동부 지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김일성의 마지막 권력투쟁 대상인 ‘갑산파’를 숙청하는 일에 깊숙하게 관여하여 성공함으로써 북한의 권력구조를 ‘집단지도체제’에서 ‘김일성 유일지도체제’로 전환하고 ‘당의 유일사상체계’ 를 확립하는데 기여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이후로 김정일은 당 조직지도부와 선전선동부 부장, 당 정치위원회 후보위원으로 선출되고 1974년 2월에 32세에 정치위원회 위원이 됨으로써 명실상부한 ‘후계자의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과정을 살펴볼 때 김정일이 ‘김일성주의’를 들고 나온 것은 통치이데올로기를 자신의 ‘권력세습’을 위한 수단으로 활용하기 위한 하나의 계략이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이어서 원인을 살펴보면, 김일성의 유일독재정권 강화와 김정일 자신의 대를 이은 권력장악을 위해 이념적 도구가 필요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입니다. 이런 해석이 가능한 것은 1974년 2월 김정일이 정치위원으로 선출된 후, 당시 당 조직지도부 부장이었던 북한 권력서열 2인자이자 김영주를 부총리로 강등시키고 양강도 산골에 연금시킨 사실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또한 ‘당의 유일사상확립10대원칙’과 각종 구호나무 발굴사업을 벌여 김일성 우상화와 신격화를 적극 추진한 것 역시 이런 해석을 뒤 받침하고 있습니다.
오중석: 북한은 ‘김일성주의’를 인류 최초로 인민대중의 자주성을 확립하는데 기여한 사상이라며 대대적인 선전활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과연 ‘김일성주의’가 북한 인민 대중의 ‘자주성을 실현’하는데 무슨 역할을 하고 있는지 말씀해 주실까요?
이현웅: 네. 김정일이 김일성주의를 북한의 통치이데올로기로 채택한 배경과 원인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온 사회의 김일성주의화를 당의 최고강령으로 선포한 목적과 의도는 김일성의 절대권력 유지와 김정일의 독재세습을 위해서였습니다. 김일성주의는 ‘혁명적 수령론’이 새롭게 추가됨으로써 혁명의 주체는 종전의 ‘인민’이 아니라 ‘수령’으로 옮겨집니다. 이때부터 북한의 인민은 ‘혁명에서 수령의 영도와 지도를 받아야만 하는 ‘대상’으로 전락하게 되며, 자주성이 사라진 ‘신민’의 위치로 바뀌게 됩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북한의 통치이념인 ‘김일성주의’나 ‘김일성-김정일주의’는 북한의 주민들의 사상을 김씨일가 독재세습을 위한 사상적 기준과 잣대로 기능을 하는 북한판 사상적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가 아닐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인민의 자주성을 확립하는 통치이데올로기가 아니라 그 정반대로 자주성을 말살하는 기준과 잣대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오중석: 과거 동독 역시 오랜 기간 동안 “인민의 자주성을 옹호하는 정권”임을 내세웠지만, 결국 사실이 아닌 것으로 주민들에게 밝혀지면서 패망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김일성주의’가 주민들에게 ‘체제이반’의 이데올로기로 작용하기 전에 ‘날조된 거짓 이데올로기’를 정리하는 작업에 신속하게 나서야 할 것입니다. 이위원님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다음 주에 다시 뵙겠습니다.
이현웅: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