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천보전투, 조작된 항일무장투쟁 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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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신문 다시 보기’. 여러분 안녕하세요. 지난 20여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노동신문을 읽은 북한 전문가, 이현웅 안보통일연구회 수석연구위원과 함께합니다. 저는 진행을 맡은 박성우입니다.

박성우: 이현웅 위원님 안녕하세요.

이현웅: 안녕하세요.

박성우: 오늘은 어떤 기사를 살펴볼까요?

이현웅: 노동신문 6월 2일자 2면에 실린 “항일의 전설적 영웅 지펴 올리신 혁명의 횃불은 영원히 타오를 것이다 – 민족재생의 서광을 불러온 보천보의 불길”이라는 제목의 기사입니다. 이 기사는 김일성이 1937년 6월 4일 일제에 항거해 무장투쟁을 벌였다는 이른바 ‘보천보전투’ 80돌을 이틀 앞두고 특파기자가 보천보전투 사적지와 보천보혁명박물관 답사 결과를 정리하여 작성한 것으로, 김일성의 ‘보천보전투’ 참여 경력을 신화처럼 부풀려 선전하고 있습니다.

박성우: 어떤 내용들을 선전하고 있는지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시죠.

이현웅: 첫째, 이 기사는 김일성이 주도했다는 ‘보천보전투’의 역사적 의의를 과장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화전민이 일본인에게 맞아 죽는 등 보천보 지방이 일제의 폭압과 전횡에 휩쓸려 있는 상황에서 지역 인민들은 항일 빨치산들이 나타나 피맺힌 원한을 풀어주길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는데, 마침 김일성이 조선인민혁명군을 이끌고 나타나 일제 탄압기관을 초토화시켰다는 것으로, 김일성의 ‘구원자적 상징’을 조작하고 있습니다.

둘째, 김일성이 ‘서강회의’에서 ‘국내진공작전’의 전략전술적 방침을 제시하고, 이에 따라 전투지휘체계를 작성하였으며, 직접 현장에 참여하여 전투를 지휘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많은 역사적 사실과 배치되고 있습니다.

셋째, 김일성의 ‘보천보전투’ 작전 종결 후 했다는 대중연설과 관련하여 “사방에서 나온 주민들의 열광적인 환호에 답례하면서 역사적인 연설을 했다”고 쓰고 있습니다. 이 역시 사실과는 다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넷째, 80년의 세월이 흘러간 지금도 보천보전투 승리의 불길은 계속 타올라 수소폭탄시험 성공, 지상대 지상 중장거리 전략 로케트와 탄도탄 발사 등 김정은의 탁월한 영도에 의해 더 큰 승리로 이어지고 있다며 김씨 가문의 우상화와 함께 세습독재를 정당화하고 있습니다.

박성우: “역사적인 사실과 배치된다”, “사실과 다르다”, 이런 지적을 여러차례 하셨는데요. 어떤 점들이 그런지 상세하게 말씀해주시죠.

이현웅: 많은 부분이 왜곡되고 과장되어 있습니다. 보천보전투가 한민족의 항일무장독립운동사에서 최대의 무장투쟁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한민족의 무장투쟁은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전투와 홍범도 장군의 봉오동 전투라는 것은 역사적으로, 학술적 연구로 입증된 사실입니다. 보천보전투의 전말은 이미 잘 드러난 상태죠. 구소련이 무너지고 중국이 개혁개방에 나서면서 보천보전투와 관련된 기록들이 공개됐고, 당시 전투에 참여했거나 목격한 사람들의 증언이 나왔기 때문입니다.

북한 주장이 사실과 다른 점을 몇 가지 더 말씀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전투는 전장에서 적의 군사와 싸우는 전쟁행위에 붙여지는 용어인데 당시 보천보에는 일본 군사무력이 없었으며, 다만 5명이 근무하는 경찰 주재소가 있었을 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적군과 전장에서 싸우는 전투라고 보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전과를 보더라도, 일본 경찰의 딸이 사망하고 일본인 장사군 한 명이 사살된 것 외에 일본 경찰이 사망한 것은 없었으며, 주재소, 면사무소, 우체국 등이 방화로 불에 탄 게 다였습니다. 이 정도 피해를 입힌 것은 ‘전투’라기 보다는 ‘방화 습격사건’이라고 보는 게 합리적이겠죠.

둘째, 보천보 국내진공작전은 북한이 주장하는 것처럼 김일성이 처음부터 구상하고 전략전술방침을 세운 게 아니라는 지적이 있습니다. 보천보전투 계획은 만주성 중국공산당 특위 서기였던 위증민이 코민테른 제7차 대회에서 채택된 ‘행동결정’에 따라 1937년 3월에 있었던 ‘서강회의’에서 ‘조선국내진공작전’을 논의하는 중에 구상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셋째, 김일성이 ‘조선인민혁명군’을 이끌고 보천보에 왔다고 했는데, 김일성은 당시 중국의 동북항일연군 소속 사장(현재의 대위 또는 소령에 해당)의 하나로 어떤 형태로든 ‘조선인민혁명군’을 이끌 수 있는 처지에 있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넷째, 전 남로당 조직부장 박갑동에 의하면, 국내 갑산파 출신으로 보천보전투에 참가한 바 있는 박금철은 당시 전투현장 지휘관은 북한의 김일성이 아니라는 증언을 남겼습니다.

다섯째, 전 인민군 작전국장 유성철에 의하면, 현재 북한 권력서열 2인자인 최룡해의 아버지 최현은 “보천보 작전이 끝나고 도망치기에 바빴는데 대중연설을 했다는 것은 다 거짓말이다”라는 증언을 남겼다는 것입니다.

박성우: 북한이 거짓과 과장으로 점철된 보천보전투를 김일성의 최대 업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목적은 어디에 있는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보천보전투에 대한 북한 주민들의 시각에는 어떤 변화가 있을 것으로 전망하시는지요?

이현웅: 먼저 당시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요. 항일투쟁이 지도자의 최고 경력으로 평가받던 광복 직후 시기에 항일 경력이 일천한 김일성이 쟁쟁한 경쟁자들을 스탈린의 도움으로 물리치고 정권을 장악하였으나 권력기반은 취약했습니다. 따라서 항일무장투쟁 경력을 확대 조작함으로써 빈약한 정권의 정통성을 보강해 보려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둘째, 항일무장투쟁은 1940년에서 1945년 해방되기 전 5년 간의 활동이 매우 중요한데 김일성은 이 기간에 소련으로 도망쳐 극동군사령부 소속 ‘88여단’에서 만주 등 국경지역 침투 및 정보수집을 위한 간첩교육을 받았을 뿐 이렇다 할 업적이 없었습니다. 이런 약점들을 덮기 위해 ‘보천보전투’를 신화적 수준으로 날조했다는 해석이 가능합니다.

북한 주민들도 시간이 갈수록 보천보전투가 조작된 신화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 전반에 대한 불신은 더욱 확산될 것으로 전망됩니다. 다만 사회통제가 여전히 강력하다보니 주민들이 입 밖으로 자신들의 생각을 말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박성우: 알겠습니다. 게다가 북한 주민들도 이젠 타치폰(스마트폰) 하나만 있으면 얼마든지 보천보전투 날조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때가 오겠죠. ‘신화’ 만들기는 정보가 통제된 사회에서나 가능하다는 점, 북한 정권이 직시해야겠습니다. ‘노동신문 다시 보기’, 지금까지 이현웅 안보통일연구회 수석연구위원과 함께했습니다. 오늘도 감사드리고요. 다음 주에 다시 뵙겠습니다.

이현웅: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