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2월 26일 미국의 전통과 권위를 자랑하는 관현악단인 ‘뉴욕 필하모닉’이 평양에서 공연을 했습니다. 동평양대극장에서 진행된 이 공연은 북한 애국가 연주로 시작해서 미국의 국가 연주로 이어졌고 대극장을 찾은 평양시민들은 일어서서 양국의 국가를 경청했습니다. 1시간 30분간 진행된 이 공연은 조선중앙텔레비젼으로 방영되고 로동신문에서도 대대적으로 선전했습니다. 당시 5년간 지속되던 북한 비핵화 협상인 6자회담이 교착상태로 이어질 기미가 있던 시기여서, 북미 외교가에서 심혈을 기울여 진행했던 만큼 국제적으로도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북한 주민들에게는 큰 감흥을 주지는 못 했습니다. 당시 북한의 무역회사에 근무하던 한 탈북민은 “문화예술계 종사자들에게는 남다르게 보였을지 모르겠지만 보통사람들에겐 별로였다”고 말했습니다. 아무리 미국의 수준 높은 문화예술이지만 보통사람들의 취향에는 지루한 외국 고전음악일뿐이었답니다. 로동신문에서도 뉴욕 필하모닉이 얼마나 유서 깊고 훌륭한 관현악단인지 적극 선전했지만 대중의 시선을 끌지는 못했답니다. 다른 탈북민의 증언도 같았습니다. 단지 미국사람들이 와서 공연했다는 것이 신선했지만 그 이상은 아니었답니다.
하지만 2001년부터 2006년까지 진행된 남한 대중 가수들의 몇 차례 북한 공연은 북한주민들이 꽤 좋아했습니다. 특히 남한가수 김연자의 공연이 인상적이었다는데요. 평양은 물론 지방 도시로 순회공연까지 있었고, 함흥에서는 김정일도 관람할 정도로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북한 주민들이 남한 가수 공연을 좋아했던 이유는 남한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가창과 무대 위의 태도, 관객들과 함께 눈 맞추고 대화하려는 인간적인 면모와 말투 때문이랍니다. 틀에 짜 넣은 듯한 북한의 기계적인 문화공연과는 달리 인간미가 풍기는 태도와 목소리라서 좋았답니다. 거기다 노래 가사는 조선 사람들이 함께 공유하는 애틋한 정서를 담고 있으니 가슴에 와닿는 울림이 더 컸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제는 남한노래를 법으로 막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과거에도 남한문화 유입을 막기 위한 109상무나 비사그루빠가 있었습니다만, 이제 법으로 금지하고 처벌합니다. 미국과 일본, 남한 등 적대국의 문화 유입을 막기 위함인데요. 지난 해 12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 전원회의에서 채택한 ‘반동사상문화배격법’입니다. ‘정상에 따라 10년까지의 로동교화형’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처벌대상은 ‘남조선의 영화나 녹화물, 편집물, 도서, 노래, 그림, 사진 등을 직접 보고 듣거나 보관한 자’와 ‘유입 유포한 자’가 해당됩니다.
문화는 정부당국이 홍보하거나 차단한다고 더 좋아하고 덜 좋아하는 성격을 가진 것이 아닙니다. 당국이 주민들에게 대대적으로 선전한 미국 최고 관현악단 연주곡과 김연자의 대중음악, 두 종류의 음악에서도 북한주민들의 확연히 다른 선호도를 볼 수 있었습니다. 문화와 예술이 권력자의 통제, 지시, 명령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대중들의 취향과 정서를 따라가는 본성을 가졌기 때문인데요. 이것이 바로 인류가 지금까지 헤아릴 수도 없이 다양한 종류의 전통 문화, 예술, 음악들을 즐기고 있는 이유입니다.
미국의 최대 동맹국이자 북한의 적대국인 일본의 경우를 예로 들 수 있겠습니다. 일본과 미국의 동맹관계는 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로 형성돼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문화가 미국에게 점령되지 않았습니다. 일본 문화는 미국과는 별개로 일본 고유의 문화예술 세계를 형성해서 세계적인 명성이 높습니다. 그 중 독특한 일본 만화영화는 ‘애니메’라는 새로운 분류로 규정돼 국제화 됐습니다. 쿠바도 좋은 예입니다. 쿠바는 카스트로 혁명 이후 공산주의 국가로 2015년 오바마 정부 하에서 미국과 수교를 맺기 전까지는 살벌한 적대 관계를 이어왔습니다. 미국과 수교를 맺은 이후로도 쿠바의 대중문화와 전통적 예술문화는 더 국제화 되었습니다. 쿠바 특유의 라틴 리듬과 룸바, 맘보 등 다양한 춤은 미국의 대중문화에 영향을 주며 큰 인기를 누리는 등 고유의 쿠바 문화를 자랑합니다.
사회주의의 혁명가 칼 막스의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국제화 주장에 따라 구소련의 지도자들은 민족주의 문화를 억제하고 러시아로 동화시키는 정책을 폈지요. 하지만 1990년 이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리투아니아 등은 구소련에서 독립해 나와 자체적인 민족문화를 즐기고 있습니다. 북한을 떠나와 한국 땅에 정착해 살고 있는 탈북민들도 북한에서 부르던 ‘심장에 남는 사람' 등 최삼숙의 노래를 즐기며 남한 사람들에게도 전파시키고 있는데요.
이렇듯 문화와 예술은 권력이 통제하거나 지도 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북한당국은 ‘반동사상문화배격법’까지 만들어 주민들을 고립시키고 있습니다. 북한당국이 70년간 형성된 북조선의 문화와 전통에 대한 자신감이 아직도 없다는 해석으로 들립니다. 동시에 북한 주민들에 대한 신뢰가 그만큼 없다는 말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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