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은경] 경제발전의 걸림돌 '혁명전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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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최남단의 남아프리카공화국까지는 한국에서 비행기로 빨라도 20시간은 날아가야 닿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먼 나라인 남아프리카공화국에 살고 있는 한국 국민을 한국에 있는 병원 의사들이 치료했다는 언론보도가 있었습니다. 남아공에 살고 있는 한국 주재원의 자녀가 희귀질환을 앓고 있었다는데요. 그 나라의 병원에서도 병명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 상황이었는데 한국의 인하대학교 부속병원에서 영상으로 원격 의료진료 상담을 진행하고 밝혀 냈답니다. 한국 의료진의 진단과 협조로 이제 환자는 현지 병원에서 성공적으로 수술까지 받고 치료 중이라고 합니다.

원격의료란 환자가 병원을 직접 방문하지 않고도 인터넷 통신망에 연결된 의료장비를 이용해서 멀리 있는 의사의 진료를 받는 의료 행위를 말합니다. 한국은 세계 최고의 정보통신 기술을 보유하고 있고 의료 수준도 높기 때문에 원격의료가 왕성하게 진행될 법한데요.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규제들과 행정절차에 묶여서 실질적 원격의료는 시행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동이 힘들거나 산골에 살고 있어서 병원 방문이 쉽지 않은 환자들 입장에서는 원격의료는 반가운 제도입니다. 병원을 방문하지 않고도 고급 의료혜택을 받을 수 있다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이익이 되기에 도입해야 하지만, 의료계는 물론, 법과 제도를 만드는 정부와 국회도 원격의료가 독이 될지 약이 될지 헷갈리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경험해보지 못했으니 후과가 어떻게 나타날지 모호하기에 원격진료를 완전히 허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과학기술을 활용한 고가의 의료장비가 필수적일텐데요. 값 비싼 장비를 구입할 능력이 있는 병원이 이 제도를 도입할 것이고, 그러다 보면 돈 많은 기업이 이익을 얻고, 따라서 의료봉사제도를 국영에서 민영으로 돌리게 되고, 결과적으로 의료혜택에서 차별이 발생할 것이라는 것이 반대하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복잡한 의료 봉사 절차에서 만에 하나 발생할 수 있는 의료사고의 책임은 누가 져야하는지 등 원격의료 제도 도입을 위해 사전에 계산할 변수들이 참 복잡합니다.

이렇게 찬반 논쟁에 묶여서 시행되지 못하던 원격의료 제도가 부분적으로 활용되기 시작한 것은 2019년 1월부터 시행한 ‘규제샌드박스’라는 제도를 통해서인데요. 새로운 산업과 최첨단의 참신하고 유용한 기술이 차고 넘치지만 제도와 규제, 법 때문에 실제 활용되지 못하는 사례가 많기에 한국정부가 채택한 정책입니다. 시험적이고 창조적인 첨단 기술을 활용한 산업들을 현장에서 실험할 수 있도록 규제를 일정 기간동안 풀어주는 제도입니다. 원래 샌드박스는 어린이 놀이터에 마련한 커다란 모래상자인데요. 아이들이 허용된 샌드박스 안에서 맘껏 안전하게 흙장난을 할 수 있게 설치해 둔 기구입니다. 이것처럼 기업인이나 기술자들이 창조적이고 혁신적인 기술을 이용한 사업들을 실험할 수 있도록 일정기간 동안 허용해주는 제도입니다. 실험을 통해서 안정성과 효율성, 수익성을 인정받게 되면 그 사업을 막고 있던 규제와 법령을 풀어서 정식사업을 하도록 보장해 준답니다. 지난 2년간 410건의 혁신 기술과 산업이 임시 허가를 승인 받았다고 합니다.

해외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을 위해 원격의료 진료를 할 수 있게 ‘규제 샌드박스’ 제도를 활용한 결과 남아공의 환자들을 치료할 수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아직도 한국은 산업과 기술 영역에 보수적인 행정절차나 전통적 유사 사업의 기득권 때문에 규제들이 넘쳐나 유연하고 자유로운 산업 육성에 걸림돌이 되고 있긴 합니다. 하지만 이처럼 특수한 실험정신을 발휘하게 보장하는 제도를 마련해서 창의력과 열의를 발전시키는 모범을 보이기도 하는데요.

북한의 경제 활성화를 위한 방안으로 규제를 완화하는 실험을 해보면 어떨까 상상해봤습니다. 왜냐면, 북한당국은 경제성장과 혁신을 위해서 규제를 풀어주고 산업을 미래로 전진하도록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 방향으로 밀고 있기 때문인데요. 70-80년 전에나 유용했던 혁명정신을 2021년인 지금까지 강조하며 ‘수령님께서 창조하신 혁명전통을 영원히 옹호 고수하고 조선혁명을 완수하자’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현실을 파악하고 있는 주민들은 다양하고 창조적이며 참신한 방법으로 장마당에서 또는 개인적 경제활동 영역에서 능력을 발휘하고 있는데요. 장마당에서 일용직으로 상품을 운송하는 일부터, 돌격대 생활에서 익힌 건설기술을 활용해서 개인 살림집을 꾸리기 위한 건설 사업을 하거나, 컴퓨터로 결혼사진이나 기념사진들을 더 예쁘게 꾸며 주는 개인 사업, 그리고 결혼식에 필요한 모든 봉사들을 대신해주는 사업 등, 북한당국이 허용하지 않는 새로운 사업들이 많습니다. 이건 북한당국의 규제와 단속을 피해서 북한 청년들도 혁신을 실험하고 있는 모습인데요.

여기서 가장 큰 걸림돌은 북한당국이 ‘혁명정신’ 운운하며 우리 주민들의 창발성과 혁신성, 경제발전의 역동성을 80년 전의 유물로 되돌리려는 시도입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