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 밤 9시경 인민군 창건 75주년을 기념하는 대규모 야간 열병식이 김일성광장에서 거창하게 진행됐습니다.
이튿날 아침 한국 언론은 앞다퉈 김일성광장에서 전해 온 현란한 사진과 영상으로 가득한 뉴스 보도들을 내보냈는데요. 북한 인민군 병역 2만 2천여 명이 동원된 행사라고 전해졌습니다. 군인들은 물론, 북한 국기를 흔들며 쉬지 않고 환호성을 지르는 시민들의 열기도 굉장해 보였습니다.
주체탑 상공으로 붉은 불빛을 터뜨리며 곡예 비행하는 전투기며, 쉴새 없이 터지는 화려한 폭죽과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열 맞춰 행진하는 각 인민군 부대의 모습, 이어서 거대한 규모의 신형 고체연료 ICBM 즉 대륙간탄도미사일로 추정되는 미사일까지 등장했습니다. 그 뒤로 북한 해설자의 목소리가 들렸는데요. “천년 무력의 초강력의 실체가 이뤄지고 있습니다”라고 소개했습니다. 실제로 김일성광장 현장에서 본다고 상상을 해보니, 앞서 묘사한 다채로운 시청각적 효과는 보는 사람을 압도하기에 충분할 것 같습니다.
이처럼 형언할 표현력이 부족할 정도로 화려하고 웅장한 열병식이었는데요. 이 행사는 북한 주민들에게 보여주는 선전이면서, 동시에 전 세계를 향한 목소리로도 들립니다. 북한 당국은 인민군대가 이렇게 강력하게 체계가 잘 갖춰 있고, 대륙간탄도미사일까지 제작할 만큼 최첨단이며, 주석단의 일가족과 몇 십 명의 지도부를 필사적으로 옹위할 태세의 병사들 모습을 국제사회에 보여줌으로써 '우리를 제발 건드리지 말라'고 말하는 듯 보였습니다. 국내적으로는 주민들에게 총비서의 지도 하에 일치단결의 정신과 애국심을 발휘하고, 지도부를 자랑스럽게 여기라고 선전하는 모습이었는데요. 주민들의 경외심과 존경을 받아 국민적 화합을 이루고, 국제사회의 인정을 받는 방법으로 이처럼 외연이 화려한 일회성 국민동원 행사 밖에 없을까요?
북한의 열병식에 하루 앞서, 한국에서는 조용하지만 역사적, 외교적으로 상당히 큰 울림을 일으킨 사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베트남전쟁, 그러니까 윁남전쟁 중 일어난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대상 집단살해 사건에 대해 한국정부가 책임이 있다는 한국 사법부의 판결이 나온 건데요.
베트남전쟁 도중 1968년 2월 12일, 베트남의 중부에 위치한 퐁니·퐁넛이라는 마을에서 베트남 민간인 집단 살해가 자행됐습니다. 한국 해병대의 한 중대 소속 군인들이 마을의 일반 주민들 74명을 집단으로 살해한 사건입니다. 당시 18세였던 응우엔 티탄 씨도 현장에 있었는데, 불행 중 다행으로 복부에 총탄을 맞았지만 거기서 살아 나왔습니다. 하지만 응우엔 씨는 어머니와 남동생을 잃었습니다. 반 세기 이상 지났지만 생존자 응우엔 씨는 한국 변호인단의 협력을 받아 2020년 4월에 한국 정부에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했습니다.
지난 7일에 이 재판에 대한 판결이 나온 것이지요. 재판부는 당시 베트남 마을 사람들의 증언과 군인들의 증언 등을 토대로 조사를 했고 응우엔 씨의 피해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이같은 행위는 명백한 불법 행위에 해당한다”고 밝히며 피고 측인 한국은 원고 응우엔 씨에게 23,720달러와 문제 해결이 지체되면서 발생한 손해에 대한 배상까지 추가로 지급하라는 1심 판결을 내렸습니다.
전쟁범죄 피해 민간인이 전쟁에 참전한 상대 국가를 대상으로 한 국가배상 소송에서 이긴 사례로 세계 유일한 판결이랍니다. 심지어 전쟁 당사국인 미국을 대상으로 한 재판에도 이같은 결과가 나온 것은 없었다고 변호사 측이 설명했습니다. 변호사는 이 사건은 국가 간의 문제라기 보다 피해자 개인이 집단 살상에 책임 있는 정부를 대상으로 사과와 진상 규명, 그리고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문제이며, 피해자로서 당연한 권리라고 설명했습니다.
과거 역사에 대한 진실과 책임규명을 법의 논리대로 진행하고, 법과 인명 존중의 가치를 행동으로 실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요. 이 보도가 나오자 한국 사회 곳곳에서 이같은 판결을 칭찬하는 논평들과 응우엔 씨와 변호인들을 응원하는 목소리가 인터넷 사회연결망에서 넘쳐 나왔습니다.
이런 것이 바로 한 국가가 존경 받는 척도가 아닐까 싶은데요. 한국은 베트남전쟁의 파병 규모로는 전쟁 당사국인 미국 다음으로 대규모 파병을 한 나라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볼 때, 이번 재판에서 한국군의 전쟁 범죄에 대한 베트남 민간인의 피해를 인정하고 개별 피해자에게 손해배상을 하라는 판결은 외교는 물론 역사와 문명의 발전 차원에서도 상당히 큰 의미가 있어 보입니다.
다채로운 불꽃놀이나 웅장한 군인들의 행진이 없어도 국민적 지지와 사회적 안정감을 형성해 낼 수 있고, 대륙을 넘나드는 위력을 갖춘 미사일을 전시하지 않아도 외교적인 존중과 신뢰를 쌓을 수 있는 외교력을 뽐낼 수 있는 방도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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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은경, 에디터 이예진,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