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에는 12월 2일로 기억되는 역사적인 사건들이 몇 가지가 있는데요. 31년 전 12월 2일은 28년간의 분단에 마침표를 찍고 첫 통일 독일의 총리를 선출한 국민 선거가 있던 날입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올해 12월 2일은 이제 6일이면 공식적으로 국가수반 자리에서 내려오는 앙겔라 메르켈 총리의 퇴임식 날로 역사에 기록됩니다.
16년의 임기를 마치는 메르켈 총리의 퇴임식은 독일 연방 군대의 열병식으로 시작된 영예로운 국가행사였는데요. 이 행사에 대한 재미난 이야기 거리가 하나 있어서 세계 언론들도 크게 주목하고 있습니다. 공식 직함을 내려놓고 떠나는 총리를 위해 군악단의 음악 연주가 있었는데 독일에는 퇴임식의 연주곡을 총리가 직접 선정하도록 권한을 주는 전통이 있답니다. 전체 세 곡을 연주하는데 그 중 한 곡에 대한 뒷얘기가 재미있고도 의미심장합니다.
"컬러 필름을 잊었군"이라는 제목의 대중 가요인데요. 1974년 동독에서 소개돼 당시 동독 청년들 사이에서 상당한 인기가 있었던 곡입니다. 경쾌한 곡조에 귀엽고 장난스런 노래가사가 특징인 노래인데요. 노랫말은 남자 친구와 바닷가로 놀러갔는데 남자친구가 칼라 필름을 잊고 흑백 필름만 챙겨왔다는 걸 알게 돼 남자 친구 미카를 질책하는 내용입니다. "네가 컬러 필름을 안 가지고 왔으니 이제 우리가 이렇게 좋은 곳에 왔던 걸 누가 믿겠어. 모든 게 새파랗고 초록빛인데 이제 더 이상 아무도 이걸 사실로 믿지 않을거야" 라고 불평하는 게 이 노래의 내용입니다.
노래 내용은 컬러 필름을 구하지 못할 정도로 모든 게 회색 빛으로 침체된 동독 사회를 풍자적으로 비판한 것으로 해석됩니다. 또 한편으로는 알록달록 예쁜 색깔들로 가득 찬 세상인데 흑백의 색깔로만 도배하게 강요하는 동독 정치에 대한 통렬한 풍자와 해학도 담겨 있습니다. 동독의 경찰들과 정치계에서도 노래 가사의 그 숨은 뜻을 알고는 있었지만 청소년들 속에서 워낙 대단해 금지시키지 못했습니다.
재미난 얘기는 여기서 그치는 건 아닙니다. 이 노래를 부른 가수는 니나 하겐 (Nina Hagen)이라는 여성인데요. 역시나 대중 예술가였던 니나 하겐의 아버지는 정치적인 이유로 동독에서 추방됩니다. 하겐도 1976년 동독 시민권을 버리고 아버지를 따라 서독으로 망명했습니다. 하겐은 그 때부터 대중 음악가로 더 활발하게 활동합니다. 미국의 대형 음반 제작사와 계약을 맺고 1978년과 79년에 이어서 25만 장 이상의 음반을 판매하는 큰 성공을 거두죠. 1980년대에도 유럽과 미국에서 열정적인 대중음악 활동을 하는 예술인으로 자리합니다. 현재 60대 중반인 하겐은 여전히 실험적인 음악을 선보이며 동시에 인권과 동물 보호를 위한 사회 캠페인에도 참여하는 의식 있는 예술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흑색과 백색으로만 도배된 과거 동독을 탈출해 나온 뒤, 본래 갖고 있던 오색 찬란한 색깔을 자랑하며 살게 된 가수 니나 하겐의 인생이 메르켈 총리 퇴임식에서 연주된 곡과 꼭 닮아 있는데요. 지금 북한 당국이 북한의 청년들에게 강요하고 있는 것이 바로 알록달록한 청년들의 본성과 생각, 능력, 창조력을 흑백 사진처럼 일색화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메르켈 총리는 퇴임식의 마지막 공식 연설의 한 부분을 소개합니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다양한 사상들과 비판적으로 접촉해서 그 방향과 계획들을 교정할 수 있는 능력으로 생존합니다. 민주주의는 서로가 다른 이들에게 갖는 존경심 그리고 다른 이해관계에 대한 존중에서 균형을 잡아가며 살아갑니다. 그 바탕에는 연대와 신뢰가 있습니다. 과학적 이해가 부정되고 음모론이 횡행하고 혐오가 조장되더라도 우리가 사실만을 신뢰함으로써 민주주의는 살아갑니다."
그녀의 연설처럼 역사는 획일화가 아닌 다채롭고 각양각색의 사상과 가치를 존중하고 그 속에서 균형을 잡아가며 발전해왔고 앞으로도 발전해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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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은경, 에디터 오중석, 웹팀 김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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