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은경] 노동자들을 위한 직맹이 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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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12월 9일, 뽈스카 즉 폴란드에서 예전에 없던 역사적인 행사가 진행됐습니다. 폴란드 최초로 전 국민이 직접 대통령을 뽑는 선거가 치러진 건데요.

보통, 자유, 비밀, 평등 선거를 통해 최초로 민주적 대통령을 뽑은 것은 역사적 주목을 받을 만합니다. 하지만 이보다 더 획기적인 일은 이 날 선거로 폴란드 국민들이 선택한 대통령이 정치인이 아니라, 조선소 노동자 출신의 노동조합 대표를 대통령으로 선택했다는 사실입니다. 폴란드 노동조합인 '솔리데러티 (Solidarity)'의 대표 레흐 바웬사 (Lech Wałęsa)입니다.

레흐 바웬사는 원래 폴란드 북부 해변도시 그단스크 조선소에서 일하던 전기기사였습니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폴란드 공산정권은 엄청난 외채를 끌어다 썼지만 중앙집권적 계획경제의 비효율성으로 마이너스 경제만 심화되는데요. 1980년 초, 주민들의 어려움을 나 몰라라 하던 정부가 식량가격마저 인상하면서 그단스크 조선소 노동자들의 불만에 불을 지피게 됩니다. 전기공이었던 레흐 바웬사는 1980년 8월 동료 노동자들과 파업에 나섰습니다. 이들은 조선소 노동자들의 먹는 문제만이 아니라, 노동자 처우 개선과 종교의 자유, 표현의 자유, 노동자들의 집회 결사의 자유 등 더 큰 의미의 시민권을 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단스크 노동자들은 '그단스크 요구안'을 만들어 정부에 제시하고 정부가 받아들일 때까지 투쟁했는데요. 이 요구안은 노동자들의 기본임금의 인상부터, 국제노동기구(ILO)의 규약에 따라 공산당과는 독립적인 노동조합 설립을 수용할 것,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 파업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할 것, 유급 육아휴직 제도를 받아들일 것 등을 담았습니다. 이 요구들은 현재 일반적인 민주주의 국가에서 중시하는 노동권들을 거의 대부분 포함한 21개 항목으로 구성됐습니다. 전 국민의 지지를 받던 노동자들의 파업은 그해 8월 말 성공적으로 정부와 대단위의 합의를 맺습니다. 노동자들의 힘으로 쟁취한 '그단스크 합의'는 공산주의 정치 체제 안에서 시민들의 민주적 변화를 이끌어 낸 역사적 사례로 기록됩니다.

노동자들의 단합된 힘으로 이뤄낸 민주적 변화는 노동당의 외곽단체인 직업동맹 같은 조직이 아니라, 노동조합 본연의 독자적인 연대 '솔리데러티'의 탄생으로 이어졌습니다. 레흐 바웬사가 이끄는 솔리데러티는 이후 노동조합 수준을 넘어서 1천 만 시민의 참여로 폴란드 전역에 걸쳐 각이한 영역의 시민들이 동참하는 시민권 단체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노동단체를 지지하는 국민적 힘은 폴란드의 정치적 민주화를 이뤄내는 기초가 되었습니다.

대국민적 지지를 받는 노동자 연대, '솔리데러티'의 투쟁은 공산주의 하의 폴란드 인민공화국이 1981년 말부터 선포한 계엄령의 탱크로도 꺾지는 못했습니다. 바웬사는 체포돼 고충도 겪었지만 노동자 연대의 활동은 10년 후 공산주의 폴란드 정부가 민주적이고 자유시장 경제에 기반한 민주주의로 성공적으로 전환하는데 기초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조선소 노동자 레흐 바웬사는 1990년 12월 말부터 폴란드 국민들의 대대적인 지지로 민주국가 폴란드의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북한도 헌법으로는 집회와 시위, 결사의 자유를 공민에게 보장한다고 명시합니다. 하지만 노동당 규약은 '근로단체는 김정은 동지가 이끄는 근로자들의 대중적 정치조직이자 사상교양단체'라고 정의했습니다. 그리고 '당의 외곽단체이고 당과 대중을 연결시키는 인전대'라고 규정하는데요. 따라서 직업총동맹이 존재하지만 노동자들의 독자적인 조직이 아니고 노동당의 지시를 받는 정치조직의 역할만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북한의 직맹은 노동자들의 근로환경 개선이나 적절한 수준으로 노동자 인건비 인상, 노동 안전 대책 마련 등을 신경 쓰는 정상적인 노동조합의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북한의 직업총동맹이 보통국가의 노동조합 역할을 제대로 수행한다고 상상해보면, 우선적으로 가장 열악한 환경에서 노동하는 돌격대의 노동환경과 처우 개선, 먹는 문제부터 해결하라고 당국에 요구해야겠지요. 그리고 전반적으로 로임을 받지 못하는 노동자들을 위해서 시장에서 한 달 먹을 쌀이라도 구입할 수 있는 수준으로 로임을 인상하라는 요구를 할 겁니다.

40년 전 레흐 바웬사가 이끌었던 노동조합인 솔리데러티의 파업은 폴란드 당국의 식량 가격 인상에 반대했지만 더 차원 높은 시민권을 요구하는 운동으로 발전했습니다. 현재 북한의 직맹은 노동자들의 기본적인 로임과 최소한의 먹을 문제 해결에도 도움이 되지 못하니 안타깝기만 합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권은경, 에디터 오중석,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