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12일 미국 백악관이 세계 주요 반도체 업체들과 자동차 생산업체들을 화상회의에 초청하여 긴급 대책회의를 주최했습니다. 외형적으로는 반도체 부품의 공급 부족으로 인해 자동차 생산이 차질을 빚고 있는 사태를 극복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본질은 미국이 전세계적인 반도체 생산망 및 배급망의 재편을 원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회의에는 한국의 삼성전자, 미국의 인텔, 대만의 TSMC 등 19개 반도체 기업의 최고경영자들이 참석했는데, 그래서 사람들은 ‘반도체 정상회의’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자동차 한 대에는 수백 개의 반도체 부품이 들어가며, 그래서 반도체가 부족하면 자동차 산업이 휘청거립니다. 현재는 차량용 반도체의 수급난으로 미국의 GM과 포드를 비롯하여 폭스바겐, 도요타 등 세계 굴지의 자동차 제조업체들이 감산에 들어갔고 한국의 현대, 기아, 쌍용 등도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하지만 반도체 문제는 자동차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반도체는 PC, 스마트폰, 가전제품 등 다양한 산업 분야와 무기 제조에 광범위하게 사용되기 때문에 반도체 생산과 공급을 둘러싼 나라들 간의 경쟁은 더욱 치열해질 전망입니다.
반도체는 크게 메모리 반도체와 시스템 반도체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메모리 반도체는 표준화된 용량으로 대량 생산하는 것이지만 시스템 반도체는 고객의 수요에 맞춰 다양한 형태와 콘텐츠를 담아야 하기 때문에 같은 라인에서 여러 제품을 동시에 생산할 수 없고 구매자의 주문에 따라 다품종 소량생산 체제로 만들 수밖에 없습니다. 반도체 제조를 단계별로 보면 설계단계와 생산단계가 있는데, 미국은 설계에 있어 세계 최고를 자랑합니다. 대표 기업으로는 퀄컴, 브로드컴, 엔비디아 등이 있는데 이들 각각의 연 매출액은 150억 달러를 넘습니다. 시스템 반도체의 최대 생산국은 대만인데, 특히 설계가 완료된 고객사의 칩을 위탁 생산해주는 파운드리 부문에서 대만의 TSMC는 세계 수요의 50% 이상을 공급합니다. 메모리 반도체의 최대 생산국은 한국입니다. 한국의 삼성전자와SK하이닉스는 메모리 시장의 주력상품인 D램 생산의 70%를 차지합니다.
미국의 입장에서 보면, 최고의 반도체 설계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반도체 생산은 세계 12%에 불과하고 80%는 대만, 한국, 일본 등 아시아 국가들이 차지합니다. 이는 비교우위에 따라 기술개발지와 생산지가 다를 수 있는 자유경제 체제의 자연스러운 결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최근 미국은 이런 생산∙공급 체제에 불안을 느끼기 시작했는데, 주된 원인은 중국의 팽창주의적 ‘반도체 굴기’ 정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중국은 2025년까지 반도체 자급률을 70%로 올린다는 목표 하에 반도체 기술 확보에 천문학적 자금을 쏟아 붓고 있습니다. 미국은 중국이 불공정 무역에서 벌어들이는 막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국가 차원에서 전략산업들을 성장시키면서 그 과정에서 기술도용, 지식재산권 침해 등을 자행해온 것으로 의심합니다. 중국이 미국과의 군비경쟁에 뛰어들고 유엔해양법을 무시하면서 남중국해, 동중국해, 대만해협 등에서 공세적인 해양정책을 펼치면서 미중 간 불신은 증폭되었습니다. 즉, 미∙중 신냉전이 격화되면서 불신과 경쟁이 반도체 분야까지 확대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중국에 대응하여 미국은 반도체의 자체생산 확대와 함께 공급망 재편을 꾀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2020년 6월 ‘반도체생산촉진법(CHIPS for America Act)’을 채택했고, 2021년 1월에는 국방수권법(NDAA)에 반도체 연구개발 및 투자에 연방정부 자금을 사용할 법적 근거를 마련했으며, 2월에는 바이든 대통령이 반도체, 배터리, 희토류, 의약품 등 4대 전략품목의 공급망에 어떤 취약점이 있는지를 조사하라는 행정명령을 내렸습니다. 4월에는 국립반도체기술센터(NTSC) 설립을 포함한 반도체 투자를 위해 2조 달러 규모의 반도체 인프라 건설 투자 계획을 발표했습니다.
이와 함께 미국은 중국의 반도체 굴기를 견제하는데 동맹국들의 협조를 구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반도체 위탁생산 부문 세계 최대기업인 대만의 TSMC는 중국 정보통신기술(ICT)기업 화웨이와의 거래를 끊은 것에 더하여 중국의 컴퓨터 중앙처리장치(CPU) 설계 업체인 페이텅의 반도체 생산 주문도 더 이상 받지 않기로 했습니다. 화웨이에 대한 제재에는 이미 미국의 동맹국들이 동참하고 있는 상태이지만, 미국은 이를 넘어 일본·대만·유럽을 포괄하는 ‘반도체 반중(反中) 연대’를 구상하는 것으로 보이며, 이는 그만큼 중국의 불공정한 상행위, 팽창주의 정책, 군비증강 등을 세계에 대한 위협으로 보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때문에 세계 반도체 시장은 앞으로도 혼란을 이어갈 것으로 보입니다. 중국이 백기투항을 하고 나올지 아니면 반도체 자립에 성공하여 더 큰 위협세력으로 등장할지는 두고 봐야 할 문제이며, 이 반도체 전쟁이 한국과 같은 나라들의 반도체 업체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불확실해 보입니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중국이 팽창주의적 대외기조를 고수하면서 반도체 굴기 전략을 고수하는 한 미국을 위시한 국제사회의 대응이 불가피하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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