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우] 아돌프 아이히만의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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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1962년 6월 1일에 있었던 일에 대해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그 날은 나치독일 시절 친위대 장교로서 수많은 유태인들을 죽음으로 몰아 넣었던 아돌프 아이히만이 이스라엘의 감옥에서 교수형에 처해지고 그의 유골이 지중해에 뿌려졌던 날입니다. 아이히만은 무수한 유태인들의 자유와 인권 그리고 생명을 빼앗은 희대의 반인륜 범죄인으로 유태인 생존자들이 세운 나라인 이스라엘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처형된 인물입니다. 1906년생인 아이히만은 26세인 1932년에 나치당에 가입하여 중사로 군인 생활을 시작하여 1937년 장교로 승진하면서 유태인 강제 추방과 수용·학살 업무를 맡게 됩니다. 아이히만은 유럽 각지에서 유태인들을 잡아들여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등 죽음의 수용소로 보내는 책임을 맡았으며, 그가 죽음으로 내몬 유태인들은 수백만 명에 달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나치독일이 패망한 후 아이히만은 미군의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하여 1950년에 아르헨티나로 도피했고, 거기서 가명을 사용하면서 10년 동안 건설사 직원, 유통업체 감독관 등으로 일하며 가족과 함께 살았지만, 집요하게 유태인 학살범들을 추적해온 이스라엘의 정보기관 모사드(MOSAD)의 정보망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아르헨티나로 잠입한 모사드 비밀요원들은 1960년 5월11일 아이히만을 납치하여 이스라엘 국영 항공기에 탑승시켜 몰래 이스라엘로 압송했습니다. 아르헨티나가 주권을 침해당했다며 유엔안보리 소집을 요구하는 등 거세게 항의했지만, 아르헨티나는 결국 이스라엘의 사과를 받아들였고 이스라엘이 그를 재판하는 것에 대해서도 시비하지 않았습니다.

1961년 4월 11일 예루살렘 특별법정에서 모세 란다우 판사의 주심으로 열린 아이히만 재판은 온 세계가 주목한 ‘세기의 재판’이었습니다. 아이히만은 수용소에서의 수백만 명 학살, 치클론-B 독가스 사용, 리투아니아인 8만 명 학살, 라트비아인 3만 명 학살, 벨라루스인 4만 5천 명 학살, 우크라이나인 7만 5천 명 학살, 키예프인 3만 3천 명 학살 계획 등 모두 15가지의 반인륜적 범죄 혐의로 기소되었습니다. 하지만, 아이히만은 뻔뻔스럽게도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고, 그가 방탄 유리벽으로 둘러싸인 피고석에 앉아 입을 열 때마다 온 세계가 분노했습니다. 그는 유태인 학살이 인류 역사상 가장 끔찍한 범죄였음을 인정하고 죄책감을 느낀다고 하면서도 자신은 “히틀러의 명령을 수행한 하수인에 지나지 않으므로 법적으로는 무죄”라는 강변을 반복했습니다. 하지만, 이후 112명의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이 직접 검찰 측 증인으로 나와 나치가 저지른 가스 살인, 구타, 시체 소각, 고문, 생체 실험 등 홀로코스트의 참상을 증언했고, 아이히만의 무죄 주장은 어떠한 설득력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아이히만 재판과 관련하여 흥미로웠던 것 중 한 가지는 미국의 잡지 ‘뉴요커(New Yorker)’의 요청으로 특파원 자격으로 재판을 참관하고 보도했던 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가 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1963)’이라는 책에 관한 이야기들입니다. 아렌트는 이 책을 통해 아이히만을 악마적 본성을 지닌 흉폭한 인물이 아닌 ‘생각할 능력이 없는 평범한 관료’로 묘사하여 큰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즉 “무신경하게 명령에 따라 유태인들을 이송했을 뿐 직접 내손으로 유태인을 죽인 적은 없다”고 하는 아이히만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여 그가 ‘생각하지 않는 죄’를 저지른 것이라고 썼고, 엄청난 죄악들도 ‘평범하고 순진한 명령 집행자’에 의해 저질러질 수 있다는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소개했습니다. 그 책은 한때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많은 심리학 교수들이 아렌트가 제시한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교재로 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아렌트는 결국 아이히만의 순진한 연기에 속은 것이었습니다. 많은 증언들을 통해 아이히만이 반유대주의 사상으로 무장한 신념형 범죄인으로서 적극적으로 유태인 학살을 주도한 사실들이 밝혀졌고, 망명지 아르헨티나에서도 나치 잔당들과 비밀모임을 가지고 반유대주의 신념을 확산시키려 한 사실도 드러났습니다. 때문에 아렌트의 책은 란다우 재판장이 아이히만에게 사형을 언도하는데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했습니다.

또 한 가지 흥미로웠던 것은 아이히만이 사형을 판결받은 후인 1962년 5월 29일 이츠하크 벤츠비 당시 이스라엘 대통령에게 탄원서를 보냈다는 사실입니다. 아이히만은 탄원서에서도 “나는 책임있는 지도자가 아닌 명령 수행자였을 뿐이었다”고 항변하면서 선처를 요구했습니다. 벤츠비 대통령은 이틀 후인 5월 31일 법무장관에게 보낸 서한에서 “모든 자료를 검토한 결과 아이히만을 사면 또는 감형할 수 있는 근거가 없다”고 통보했습니다. 바로 그날 밤 자정 2분 전에 교수형이 집행되었고 6월 1일 아이히만의 유골은 지중해에 뿌려졌습니다.

물론, 인간의 자유와 인권을 말살하는 반인륜적 범죄는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이히만의 최후를 기억하면서 그리고 이라크의 독재자 후세인이나 리비아의 독재자 카다피가 비참한 최후를 맞았던 사실을 상기하면서, 반인륜적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들은 언젠가는 처벌을 받게 된다는 역사의 교훈을 배울 수 있는 것 같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