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우] 터키군의 6∙25 참전 영웅 메흐멧 고넨츠 중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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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국보훈의 달 6월을 맞이하여 오늘은 터키군의 6·25 참전사를 회고해보고자 합니다. 6·25 전쟁 동안 한국을 도와 참전한 국가는 총 16개 국이었는데, 북미에서는 미국과 캐나다, 남미에서는 콜롬비아, 아시아에서는 호주, 뉴질랜드, 필리핀 그리고 태국, 아프리카에서는 남아공과 에티오피아 그리고 유럽에서는 영국, 벨기에, 프랑스, 그리스, 룩셈부르그, 네덜란드, 터키 등 7개국이 군대를 보냈습니다. 인도, 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 이태리 등 5개국은 의료지원단을 보냈는데, 총 21개국이 대한민국을 도운 셈입니다. 이 중에서 터키는 네 번째로 많은 1만 5천여 명의 지상군을 파병하여 전사 741명, 부상 2,068명, 실종 163명, 포로 244명 등 총 3,200여 명의 인명 피해를 입었습니다.

터키군은 중공군이 개입하기 직전인 1950년 10월에 1개 여단 규모로 파병되어 1950년 11월의 청천강 전투, 1951년 1월의 김장령 전투, 151 고지 전투, 1951년 4월 장승천 전투, 1953년 5월 네바다 전초전 등 다양한 전투를 치렀습니다. 청천강 전투, 즉 터키군이 ‘군우리 전투’리고 부르는 이 전투는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유엔군이 압록강까지 북진했다가 다시 중공군의 반격에 밀려 전세가 재역전된 시점인, 1950년 11월 청천강 일대에서 중공군과 유엔군 사이에 벌어진 격전을 말합니다. 1950년 11월 25일 중공군의 대규모 공격으로 시작된 이 전투에서 미군 제9군단 제2사단에 배속된 터키군 제1여단은 군우리와 순천 간 협곡지대의 와원, 신립리, 개천, 덕천 등에서 중공군 제38군 예하 3개 사단의 집중공격에 맞서 중공군에게 5천여 명의 인명 피해를 안겨주면서 미 제8군이 철수할 수 있도록 시간을 벌어주고 12월 1일 평양까지 철수했습니다. 청천강 전투는 한국전쟁 역사상 가장 격렬하고 파괴적인 전투 중 하나였고, 터키군은 그 한 복판에서 엄청난 희생을 치르면서 유엔군의 철수를 도왔습니다. 군우리 전투는 터키군에게 가장 큰 인명피해를 입힌 전투였습니다.

청천강 전투 이후 중공군에 밀려 다시 서울 이남까지 후퇴했던 유엔군은 공세로 전환하기 위해 미 8군사령관 리지웨이 (Matthew Ridgeway) 장군의 명령 하에 1951년 1월 대규모 공세적 수색작전인 썬더볼트작전 (Operation Thunderbolt)을 시작했는데, 김장령 전투와 151 고지 전투는 이 과정에서 터키군이 중공군과 백병전을 치르면서 151 고지와 김장령을 점령한 전투였습니다. 압도적인 수적 우세를 가진 중공군을 이긴 이 전투로 터키군의 사기가 크게 높아졌고, 터키 정부는 서방국들로부터 축하를 받았으며, 터키군은 미국 대통령과 한국 대통령으로부터 부대 표창을 받았습니다. 장승천 전투는 1951년 4월 중공군이 36개 사단을 총동원하여 전 전선에서 공세를 펼친 춘계공세시 터키군 제1여단이 200여 명의 인명 피해를 입으면서 연천 동북방의 장승천에서 중공군 제60군 예하 제179사단과 치른 격전을 말합니다. 네바다 전초전은 1953년 5월 중공군이 정전협정을 앞두고 한치라도 더 많은 영토를 점령하기 위해 공방전을 펼치던 시절 터키군 제1,2 여단에 이어 교체 투입된 터키군 제3여단이 개성시 인근 고랑포에서 중공군 제120사단 예하 2개 연대와 치른 전투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장승천 전투의 영웅 메흐멧 고넨츠(Mehmet Gunenc) 중위를 회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951년 4월 22일 저녁 19시 중공군은 터키군 제1여단 제9중대가 배치된 장승천 일대에 40분 동안 포격을 가한 후에 총공격을 가해 왔고, 터키군은 포격으로 포병진지와 통신시설이 피해를 입은 상태에서 중공군의 인해전술과 맞서야 했습니다. 전방 포병관측 장교였던 메흐멧 고넨츠 중위는 아군 포병본부에 긴급 포격을 요청하면서 자신의 중대가 주둔한 장소를 포격 좌표로 송신했습니다. 포병본부는 자신을 향해 포를 쏘라는 고넨츠 중위의 요청에 포격을 망설였지만 고넨츠 중위는 “적군이 이미 우리 지역을 점령했다. 우리는 적군의 포로가 되기보다는 아군의 포격을 맞아 죽고자 한다”고 말했습니다. 포병본부는 결국 그의 요청을 들어 주었고, 고넨츠 중위는 적군과 함께 산화했습니다.

대한민국 국가보훈처는 그의 숭고한 희생과 무공을 기리고자 2014년 5월 고넨츠 중위를 '이달의 6·25 전쟁 호국영웅'으로 선정했고, 2018년 터키 하비에르 군사박물관은 장승천 전투 당시 고넨츠 중위가 썼던 서신을 공개했습니다. “오늘 많은 친구들이 한국의 산중에서 영원히 잠들었다. 그들 중 어느 한 사람도 마지막 숨을 내쉴 때 결코 슬퍼하지 않았다." 6·25 전쟁에서 대한민국의 자유를 지켜주기 위해 장렬히 산화한 터키군 청년 장교의 편지가 67년만에 세계에 공개된 것입니다. 이런 인연으로 터키는 형제의 나라가 되었고, 지금도 터키는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나라 중 하나입니다. 경기도 연천군 연천읍 동막골 골짜기에는 터키군의 참전에 감사하고 터키군의 영웅적인 희생을 추모하는 장승천 전투 전적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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