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우] 6∙25 참전 미군의 전쟁영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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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년 6월 25일은 6·25 전쟁 발발 71 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그리고 6월은 호국보훈의 달입니다. 지난 5월 21일 문재인 대통령이 백악관을 방문했을 때 6·25 참전 노병에게 미군의 최고 영예인 명예훈장을 수여하는 행사가 있었습니다. 바이든 대통령이 문 대통령의 면전에서 참전 노병 한 사람에게 훈장을 수여했고, 두 대통령은 노병의 양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기념촬영을 했습니다. 훈장의 주인공은 94세의 랄프 퍼켓 예비역 대령이었습니다. 1950년 11월 청천강 전투 당시 미 8군 8213부대 소속 레이저 중대의 중대장이었던 퍼켓 중위는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맞서 영웅적으로 싸웠던 참전용사였습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이 일제히 기습공격을 시작하자 아무런 준비없이 전쟁을 맞았던 한국군은 황급히 남쪽으로 패주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다급한 파병 요청에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즉각 파병을 결정했습니다. 하지만 전쟁 초기의 전세는 매우 비관적이었습니다. 북한군은 사흘 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쾌속 남진을 계속했습니다. 1950년 7월초 일본에서 갑작스럽게 날아온 미 24사단의 스미스 부대가 오산 죽미령에서 북한군과 최초로 조우하여 큰 피해를 입었고, 7월 중순 대전 전투에서는 미 제24사단장 딘(William F. Dean) 소장이 포로로 잡히는 수모를 겪기도 했습니다. 8월 하순 북한군은 대한민국 영토의90%를 점령하고 낙동강까지 진출하여 공산통일을 눈앞에 두었지만, 대구 북방의 다부동 전투에서 패함으로써 남진을 멈추어야 했습니다. 1950년 9월 15일 역사적인 인천상륙작전 이후 전세가 역전되어 한국군과 유엔군은 9월 18일 서울을 탈환하고 평양을 점령한 후 압록강에 이르렀지만, 중공군의 개입으로 다시 후퇴해야 했습니다. 이런 전쟁 과정에서 수많은 미군의 전쟁 영웅들이 탄생했습니다.

미군의 전쟁 영웅으로 우선 1950년 낙동강 전선에서 한국군의 백선엽 장군을 도와 북한군을 저지한 미8군 사령관 워커(Walton H. Walker) 장군을 들 수 있습니다. 워커 장군은 그해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미24사단에서 중대장으로 참전 중이던 아들 샘 워커 대위가 은성무공훈장을 받게 되자 직접 훈장을 달아주려고 가다가 그가 탄 지프가 한국군 트럭에 부딪혀 유명을 달리했습니다. 오늘날 서울시 광진구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는 워커 장군을 기념하여 건립된 워커힐호텔이 서 있습니다. 6·25 전쟁의 분수령이 되었던 인천상륙작전을 주도한 맥아더 장군(Douglus MacArthur)은 두말 할 나위가 없는 최고의 영웅이었습니다. 이 작전으로 보급선이 끊긴 인민군은 북중 국경 근처까지 후퇴했었습니다. 서해를 굽어보는 인천의 ‘자유공원’ 에는 맥아더 장군의 동상이 우뚝 서있습니다.

1950년 겨울 중공군이 개입하면서 벌어진 장진호 전투는 ‘한반도판 스탈린그라드 전투’라고 불릴 만큼 치열했습니다. 이 전투에서 항공기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사양하고 육로로 철수하면서 중공군 9병단에 막대한 피해를 입혀 흥남철수작전을 가능하게 만들었던 미 해병 제1사단장 스미스(Oliver P. Smith) 장군도 진정한 영웅이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미 해병 제1사단은 전사자 730명을 포함하여 4,400명의 전상자를 기록했는데, 미군들은 장진호 전투를 ‘후퇴했지만 승리한 위대한 전투’라고 부릅니다. 1950년 12월 교통사고로 사망한 워커 장군 후임으로 미 8군 사령관에 부임했다가 1951년에는 맥아더 장군의 뒤를 이어 유엔군 총사령관이 되어 6∙25 전쟁을 총지휘했던 리지웨이(Matthew B. Ridgway) 장군도 한국전의 영웅이었습니다. 2차대전의 맹장이었던 그는 한국전에서 중공군을 서울 이북으로 격퇴시키고 자유 대한민국을 지켜주었습니다.

리지웨이 장군의 후임 8군 사령관으로 보직된 밴플리트(James Van Fleet) 장군도 한국인들의 가슴 속에 길이 남아 있는 영웅이었습니다. 1,2차 세계대전과 그리스내전에 이어 6·25 전쟁에 참전한 밴플리트 장군이 재임했던 시기는 서울을 두 번씩이나 함락당했다가 수복한 후 한반도 중부 지역에서 중공군과 뺏고 뺏기는 고지 쟁탈전을 반복하던 때였습니다. 장군은 전쟁의 와중에서 한국군을 징집하여 훈련을 시켰고, 간부들을 미국 군사학교에 유학시켜 전술교리를 습득하도록 하여 ‘한국군의 아버지’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습니다. 또한 그는 미 공군의 폭격기 조종사로 한국전에 참전했다가 격추되어 실종된 자신의 아들 밴플리트 2세(Van Fleet Jr.)에 대한 수색작전을 중단시킨 일화로도 유명합니다. “내 아들을 찾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아들들의 생명을 위태롭게 해서는 안 된다” 는 것이 그의 명령이었습니다. 밴플리트 장군은 전쟁 후에도 한국군의 현대화를 위해 물심양면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한미 우호증진을 위한 각종 사업을 전개하면서 한국의 경제재건을 도왔습니다.

장장 1,129일 동안 지속된 6·25 전쟁은 한반도를 폐허로 만들고 숱한 인명 피해를 발생시켰습니다. 이 전쟁으로 한국군은 62만여 명의 전사자, 부상자, 실종자 등을 기록했고, 미군은 연인원 백8십여만 명이 참전하여 5만4천여 명의 고귀한 생명을 희생시켰습니다. 그들 모두가 6·25 전쟁의 영웅들이었습니다. 이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오늘의 번영된 대한민국도 존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호국보훈의 달을 맞이하여 삼가 호국영령들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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