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의 영웅 백선엽 예비역 대장이 지난 10일 노환으로 별세했습니다. 101세 고령의 백 장군이 올해초 서울대 병원에 입원하셨을 때부터 많은 사람들은 그분에게 남은 날들이 많지 않음을 직감했지만, 백 장군은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10일 밤 11시 경에 영영 국민의 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한미 정부와 주한미군 그리고 각 단체들의 애도가 쏟아지는 가운데 대한민국 육군은 서울아산병원에 육군장으로 그분의 장례를 치렀으며, 서울시내 곳곳에 시민단체들이 설치한 빈소에는 궂은 비가 내리는 가운데서도 시민들과 예비역 및 현역 군인들의 조문이 이어졌습니다.
1920년 11월 23일 평안남도 강서군 덕흥리에서 태어난 백 장군은 자유민주주의를 찾아 1945년 남쪽으로 오신 후 대한민국의 기둥이 되신 분입니다. 백 장군은 6·25 전쟁 중 사단장, 군단장, 참모총장 등을 거치면서 절망에 빠진 조국을 지켜낸 구국(救國) 영웅이었습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남침을 개시하여 물밀듯이 밀고 내려왔을 때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전쟁을 맞이한 대한민국 군대는 후퇴를 거듭해야 했지만, 백선엽 사단장이 지휘하는 경인지구의 제1사단, 김종오 사단장 휘하의 춘천 지구의 제6사단, 이성가 사단장 휘하의 강릉 지구의 제8사단 등은 와해되지 않고 사단체제를 유지하면서 북한군의 남진을 지연시키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럼에도 8월이 되면서 북한군은 이미 대한민국 국토의 90% 이상을 점령했고, 대한민국의 영토는 낙동강을 따라 마산-왜관-포항을 잇는 선으로 축소된 상태였습니다. 이렇듯 대한민국의 운명이 백척간두(百尺竿頭)에 섰던 1950년 8월 부산항을 통해 들어오는 제24사단 등 미군이 마산과 왜관을 잇는 왼쪽 방어선을 사수하는 동안 한국군 제1사단의 백선엽 장군은 북쪽의 다부동에서 북한군 최정예 3개 사단의 남진(南進)을 성공적으로 저지하고 낙동강 전선을 사수했습니다. 그것이 다부동 전투였습니다. 유엔군의 9·15 인천상륙작전으로 북한군의 보급로가 차단되고 북한군이 후퇴하기 시작했을때 백 장군은 북진의 선봉으로 평양에 입성했고, 중공군의 개입으로 다시 후퇴하여 서울을 내준 후인 1951년 봄 한미군이 서울 재탈환 작전을 벌일 때에는 백 장군도 선봉에 섰습니다.
백선엽 장군은 미국 국민이 가장 존경하는 한국인이기도 했습니다. 백 장군은 한국 정부로부터 태극무공훈장 등 각종 훈장을 수여받았지만, 미국으로부터도 은성무공훈장, 자유수호의상 등을 받았으며, 캐나다로부터도 무공훈장을 받은 국제적으로 알려진 명장이었습니다. 백 장군은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미8군 명예사령관으로 재직했는데, 미군이 외국인을 명예사령관으로 추대한 것은 백 장군이 유일했습니다. 주한미군 사령관과 주한 미 대사가 부임하면 백 장군을 찾아 예우를 표했으며, 미군은 2사단 본부에 ‘제네럴 백선엽 히어로 룸’을 만들어 백 장군의 흉상과 업적이 새겨진 현판을 설치했고, 주한미군사령부가 평택으로 이전한 후에도 청사에 ‘백선엽홀’을 마련하여 그분의 공적을 기리고 있습니다. 이렇듯 백선엽 장군은 조국을 절망으로부터 구해낸 구국의 영웅이고 한미동맹의 상징이자 대한민국의 안보자산이었습니다.
이제 백선엽 장군은 영영 돌아오시지 못할 길을 떠나갔습니다. 그럼에도 그가 보여준 임전무퇴(臨戰無退)·결사보국(決死保國)의 의지와 그가 이룬 전공(戰功)과 구국 활동은 온 국민의 뇌리 속에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특히, 열악한 장비와 숫적 열세를 극복하고 최후의 방어선을 지켜낸 다부동 혈전은 6·25 전쟁사에서 영원히 남을 빛나는 승리로 기록될 것이며, 다부동 전투는 인천상륙작전, 장진호 전투 등과 함께 6·25 전쟁 중 대한민국을 지킨 3대 전투로 기록될 것입니다. “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 다부동 전투 당시 백 장군이 부하들에게 했던 이 말은 지금도 후배 군인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습니다. “살아남은 자들의 훈장은 전사자들의 희생 앞에서는 빛을 잃는다” 전사한 부하 장병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시한 이 말도 널리 회자되고 있습니다. 부디 백선엽 장군의 편안한 영면(永眠)을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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