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이 되면 경상북도 대구 북방의 다부동과 동해안의 포항에서는 1950년 8월의 다부동 전투와 포항 전투를 회상하는 행사들이 열립니다. 이들은 북한군이 대한민국 국토의 90%를 점령한 상태에서 한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 전선에서 북한군을 저지하기 위해 벌인 전투였습니다. 그야말로 대한민국의 생사를 건 한판의 승부였습니다.
6월 25일 38선을 기습 돌파하여 쾌속 남진을 계속한 북한군은 8월 초순에 낙동강과 포항을 잇는 선까지 진출하여 공산통일을 향한 최후의 일격을 시도했습니다. 그때 다부동 전투와 포항 지역 전투에서 유엔군과 한국군이 패배했더라면 오늘의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백선엽 장군이 지휘하는 한국군 제1사단과 미 제1기병사단은 미 공군의 강력한 공중지원 하에 다부동에 투입된 북한군 제3사단, 제13사단, 제15사단 등의 총공세를 저지합니다. 이 전투에서 북한군은 남침 이후 처음으로 막대한 인명 피해를 입고 물러나는데, 그래서 전사가들은 다부동 전투를 ‘한국전쟁의 베르됭 전투'라고 부릅니다. 베르됭 전투는 제1차 세계대전 중인 1916년 2월부터 12월까지 프랑스 동북부의 베르됭(Verdun)에서 독일군과 프랑스군이 벌인 전투로서 ‘역사상 가장 참혹했던 소모전’으로 불립니다. 이 전투에서 양측은 70만 명의 인명 피해를 입었고, 특히 독일군은 압도적인 병력 및 물자의 우세에도 불구하고 베르됭을 돌파하지 못했으며, 그것이 제1차 대전의 흐름을 바꾼 전환점이 되었던 것입니다.
포항전투는 1950년 8월 10일부터 31일까지 포항 지역에서 한국군 제3사단, 민기식 부대, 학도병 등이 낙동강 방어선을 돌파하려던 북한군 제5사단, 제12사단, 제766부대 등과 맞붙어 싸운 전투를 말합니다. 크게 보면, 포항 북부에서 고립된 한국군 제3사단을 철수시킨 장사동 철수작전, 포항 방어 전투, 포항 탈환 작전, 포항 좌측의 안강·기계 전투, 포항 북부 흥해 지역에서의 전투 등이 모두 포항 지역 전투에 포함됩니다. 민기식 부대란 북한군에 밀려 후퇴하면서 병력과 장비가 크게 줄어든 제7사단 잔류병력에 학도의용군, 지원병 등을 보충하여 재편한 부대로서 재편성을 책임진 지휘관이 민기식 대령이었기 때문에 ‘민부대’로 불렸습니다. 제766부대란 북한군 주공부대에 앞서 한국군 지역에 침투하여 한국군의 후방을 교란하고 보급로를 차단하여 북한군의 남진을 용이하게 만들기 위해 투입되었던 북한군 특수부대를 말합니다.
1950년 8월 10일 북한군 제12사단이 포항 북방 해안마을인 흥해를 점령했는데, 이로써 영덕과 강구에서 북한군 제5사단과 싸우던 한국군 제3사단은 퇴로가 막힌 상태에서 고립되고 말았습니다. 한국군 제3사단이 발이 묶인 상태에서 북한군은 8월 11일 포항을 점령했는데, 그 과정에서 한국군 해군 경비부 요원, 공군 포항기지부대 중대, 경찰, 청년방위대 등이 방어에 나섰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600여 명으로 추정되는 학도병들이 이 전투에 참가하여 대부분이 희생된 이야기는 오늘날까지도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포항고, 동지고, 포항수산고 등 고등학교 학생들로 구성된 학도병들은 포항에 제일 먼저 진주한 북한군 제766부대에 맞서 소티재와 포항여중에서 강력히 저항했으나 대부분이 전사했습니다. 어린 학생들로 급조된 부대가 북한군의 최정예 부대와 맞붙어 싸운 것입니다. 포항이 북한군의 수중에 떨어지자 한국군은 민부대를 영천에서 포항으로 이동시켜 탈환 작전에 나서게 했습니다. 8월 17일에는 퇴로가 차단당해 고립되어 있던 한국군 제3사단 9천여 명과 경찰 1,200여명, 지방공무원 등 민간인 1만여 명을 미 제8군의 지원 하에 전원 해상을 통해 구룡포로 철수시켰는데, 그것이 유명한 장사동 철수작전이었습니다. 이후 제3사단은 민부대가 탈환한 포항으로 들어가 8월 31일까지 포항 북방 흥해 일대에 머물고 있던 북한군 제5사단과 공방전을 계속하게 됩니다.
대구와 포항에서 낙동강 전선을 돌파하려 했던 북한군은 다부동과 포항에서 저지당하자 9월초부터는 대구와 포항의 중간 지점인 영천에 북한군 제2군단 주공부대들을 투입하여 한국군 방어선을 돌파하려 했지만, 이 역시 한국군 제8사단과 제7사단에 의해 저지당하게 됩니다. 그것이 곧 영천 전투였습니다. 이후, 9월 15일 유엔군의 인천 상륙작전의 성공과 함께 9월 16일부터는 한국군과 유엔군의 반격이 시작되었습니다. 한국군과 유엔군이 분전하여 낙동강 방어선을 지켜냈던 다부동 전투, 포항 전투, 영천 전투 등은 결코 잊을 수 없는 6·25 전쟁의 한 토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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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우, 에디터: 오중석, 웹팀: 최병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