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15일 탈레반이 카불을 점령함으로써 아프가니스탄은 다시 탈레반의 수중에 들어갔습니다. 이 과정에서 1975년 5월 남베트남이 패망할 때 사이공에서 벌어진 엑소더스가 재현되고 있습니다. 카불 국제공항에서는 미 공군의 C-17 수송기들이 탈레반을 피해 피신하고자 하는 아프간 사람들을 실어 나르기 위해 분주하게 이착륙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세계 각국들도 탈출자들을 돕기 위한 방안을 협의하기 시작했습니다.
아프간은 아시아와 중동 그리고 남아시아를 잊는 전략적 요충지이며 많은 석유가 매장된 카스피해 지역으로 진출하는 통로입니다. 그래서 지난 19세기 이래 영국은 이곳을 러시아의 남하를 막는 요충지로 보고 세 차례나 아프간을 점령했습니다. 미국은 2001년 9·11 테러를 당한 직후 테러의 배후인 빈 라덴을 잡기 위해 NATO의 국제안보지원군과 함께 ‘지속적 자유 작전 (Operation Enduring Freedom)’을 펼쳐 탈레반을 몰아내고 이슬람공화국을 수립하여 정부군을 양성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미군이 철수하자 탈레반은 정부군을 단숨에 굴복시키고 카불에 입성했습니다.
이번 아프간 사태는 한국과 미국 그리고 국제사회에 두 가지의 큰 교훈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이번 사태가 주는 첫번째 교훈은 스스로를 지키려는 능력과 의지를 가지지 않은 나라에게는 미래가 없음을 재확인시켜 주었다는 점입니다.
1973년 파리평화협정으로 베트남전쟁이 종료된 후 남베트남은 부패와 혼란 그리고 분열의 도가니였습니다. 반미·반정부 시위와 분신자살이 일상이 되었고 북베트남 간첩들은 정부와 군대, 시민단체, 종교단체, 언론 등에서 암약하면서 겉으로는 평화주의자나 민족주의자로 활동했습니다. 파슈툰족, 타지크족, 하자라족, 우즈베크족 등 다양한 종족과 30여 개의 언어가 공존하는 아프간도 부정부패와 종족 갈등으로 얼룩져 있었고, 아프간 정부군은 정부의 부패로 월급과 식량을 제대로 보급받지 못해 사기가 크게 저하된 상태였습니다. 1975년 북베트남군이 재침을 시작하자 남베트남군은 56일 만에 항복해버렸습니다. 영혼이 떠나간 군인들에게 미군이 제공한 첨단무기들은 아무런 의미도 없었습니다. 30만 명의 아프간 정부군은 양적 우위에다가 공군기들까지 보유하고 있었지만, 7만5천명 탈레반의 공세 앞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대통령은 해외로 피신했고 그의 동생은 탈레반에 충성을 맹세했습니다. 이런 나라에게 무제한 도움을 제공할 나라는 없을 것입니다.
아프간 사태가 남긴 두 번째 교훈은 군사적 상호억제가 안착되지 않은 상태에서 흑심을 가진 상대와의 평화협정은 결국 다른 일방의 패망과 참극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재확인할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사실 미국은 1973년 1월 파리평화협정으로 베트남전쟁을 마감하면서 협정의 준수와 전쟁 재발 방지를 위해 많은 조치들을 취했습니다. 미국, 남북 베트남, 남베트남임시혁명정부 등 4대 교전당사국에 8개국을 더하여 도합 12개국이 서명하도록 했고, 250명의 휴전감시위원단도 파견했습니다. 북베트남에 40억 달러의 원조를 제공했고 남베트남과 별도의 방위조약도 체결했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무용지물이었습니다. 아프간에서도 그랬습니다. 2020년 2월 29일 카타르의 도하에서 체결한 미-탈레반 평화협정도 무용지물이었습니다. 파리평화협정 후 2년만에 자유베트남은 패망했고 미-탈레반 평화협정 후 1년반 만에 아프간도 무너졌습니다.
이번 아프간 사태를 보면서 바이든 대통령은 “나토, 한국, 대만 등의 경우는 다르다. 피침되면 즉각 대응하겠다”고 강조했습니다. 특히, 한국은 70년 전통의 동맹조약을 맺고 있는 신냉전 시대의 전략요충지라는 점에서 아프간과는 많이 다릅니다. 그럼에도 이번 아프간 사태는 한국 정부와 국민에게 한반도의 안정과 평화를 위해 무엇부터 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일러주고 있습니다. 즉, 스스로를 지키는 안보역량과 의지 그리고 굳건한 동맹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일깨워 준 것입니다.
김태우, 에디터 오중석, 웹팀 최병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