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우] 98세 생신 맞은 백선엽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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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선두에 서겠다. 내가 물러서면 너희들이 나를 쏴라." 6·25 전쟁 당시 다부동전투에 임하면서 당시 한국군 제1사단장이었던 백선엽 장군이 했던 말입니다. 당시 북한군은 남한 영토의 90%를 점령한 상태에서 낙동강 전선만 넘으면 곧바로 적화통일을 완성할 수 있는 상황에 있었고, 낙동강 전선은 대한민국을 지키는 최후의 방어선이었습니다. 백선엽 장군은 이 전투에서 승리했고, 이후 북한군이 패퇴하면서 평양에 첫 번째로 진군한 것도 백선엽 장군이었으며, 중국군의 참전으로 다시 서울을 빼앗긴 후 서울을 재수복할 때에 선봉에 섰던 것도 백선엽 장군이었습니다. 32세의 나이로 국군 최초로 대장에 오른 최고의 야전사령관이었고, 6·25 전쟁의 영웅이자 한미동맹의 산 증인이기도 한 그 백선엽 장군을 위해 주한미군이 지난 11월 21일 98세 생신을 축하하는 깜짝 파티를 열었습니다.

이날 파티에는 최근에 부임한 로버트 에이브럼스 신임 주한미군 사령관 등 미군 수뇌부가 총출동했고, 한국 쪽에서도 정경두 국방장관, 박한기 합참의장 등이 참석했으며, 해리 해리스 주한 미국대사, 사이먼 스미스 주한 영국대사 등도 참석하여 백 장군의 생신을 축하했습니다. 백선엽 장군은 일제 강점기였던 1920년 11월 23일 평안남도 강서군 덕흥리에서 태어나 1946년 보병 제5연대 중대장으로 한국군 생활을 시작했고, 1947년에는 제5연대장으로 그리고 1948년에는 국방경비대 총사령부 정보처장으로 복무했습니다. 1949년에는 광주 주둔 제5사단장이 되었고, 1950년 4월 23일에는 서부전선 최일선을 담당하는 제1사단장으로 부임했지만, 그로부터 2개월 후 6·25전쟁이 발발하자 1,000일 이상 최전선에서 무용(武勇)을 떨치며 '한국군 최고의 야전사령관' 이라는 명성을 얻게 됩니다.

전쟁이 시작되자 개성-임진강 정면을 방어하던 백선엽 장군의 제1사단은 서부전선에서 북한군의 남진을 지연시키면서 후퇴했고, 준장으로 진급한 7월 이후 대구 북쪽의 다부동에서 조국의 운명을 건 혈전을 벌였습니다. 1950년 8월 북한군은 낙동강 전선을 돌파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는데, 긴급히 파병된 미군과 함께 한국군은 최후의 결전에 임했습니다. 백 장군의 제1사단은 다부동에서 북한군 제1사단, 제3사단, 제13사단등을 저지했습니다. "우리에게는 이 이상 내려갈 곳이 없다. 여기가 격파되면 나라가 망하고, 대한민국에겐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 보라, 우리를 돕기 위해 지구 저쪽에서 온 미군이 저 아래 골짜기에서 싸우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살겠다고 후퇴하면 대한의 남아로서 부끄러운 일이다." 다부동 전선이 뚫릴 위기에 처해있던 당시 백선엽 장군이 피로에 지친 장병들을 격려하면서 했던 말입니다. 백 장군이 지휘한 1사단은 다부동전투에서 8,000명의 병력으로 2만여 명의 북한군 총공세를 한 달 이상 막아냈습니다. 그러는 동안 미 25사단 27연대, 23연대, 국군 8사단 10연대 등이 증원되었고, 9월 15일 맥아더 장군의 역사적인 인천 상륙작전과 함께 보급로를 차단당한 북한군은 퇴각을 시작합니다.

이후 백선엽 장군은 1950년 10월 한미군이 38선을 돌파할 때 선봉에 섰고, 선두 전차부대의 1번 탱크에 탑승하여 평양에 입성했으며, 청천강을 넘어 평안북도 운산까지 진출하는 등 중공군의 대거 개입으로 다시 후퇴에 나서기 전까지 승승장구하게 됩니다. 이후 백 장군은 1952년에는 육군참모총장에 오르고, 1953년 1월 31일 한국군 최초의 대장이 됩니다.

백선엽 장군은 살아있는 6.25 전쟁의 영웅이자 전설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주한 미국 대사나 주한미군 사령관이 새로 부임하면 가장 먼저 백선엽 장군을 찾아가 깍듯한 예우를 갖추어 인사를 드리는 것이 관례가 되어 있습니다. 한국 국민은 백 장군이 돌아가시면 이런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될 것이라면서 그 분의 장수를 기원하고 있습니다. 국민적 성원을 의식이라도 하는듯 백선엽 장군은 지금도 술, 담배를 하지 않으면서 자신이 고문으로 있는 군사편찬위원회가 있는 전쟁기념관으로 매일 출근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그분의 무병장수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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