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년 전 1월, 즉 1951년 이맘때 한반도에서 벌어졌던 일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그날을 살았던 분들은 대부분 세상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생존 참전용사들의 뇌리 속에 그리고 역사 속에 생생히 살아 있습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기습 남침 후 나흘 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파죽지세로 남진했던 일, 유엔군이 들어오고 한·미군이 마지막 남은 낙동강 전선에서 사투를 벌렸던 일, 맥아더 장군의 역사적인 인천 상륙작전으로 석 달 만에 서울을 되찾고 38선을 넘어 압록강까지 진격했던 일 등은 결코 지울 수 없는 기억들입니다.
하지만, 1950년 겨울 북한으로 진격했던 유엔군들이 크리스마스 이전에 전쟁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며 기뻐했던 순간 30만 명의 중공군이 압록강을 넘어왔고 이후 중공군은 세 차례에 걸친 대공세를 통해 유엔군과 한국군을 남쪽으로 패퇴시켰습니다. 미 해병 제1사단은 함경남도 장진군까지 진격했다가 황급히 후퇴하면서 인해전술을 앞세우고 포위 공격을 해오는 중공군을 맞아 장진호에서 처절한 전투를 벌려야 했습니다. 결국 10만여 명의 한국군과 유엔군은 12월 흥남에서 배편으로 철수했고, 필사적으로 공산 치하를 벗어나려는 10만 명의 북한 주민들도 함께 배에 올랐습니다. 그리고는 중공군은 제3차 공세를 통해 1951년 1월 4일 다시 서울을 점령했습니다. 이후 한국군과 유엔군이 서울을 재수복했던 3월 16일까지 72일 동안 수많은 전투가 벌어졌는데, 원주 전투와 지평리 전투도 그 시기에 벌어진 격전이었습니다.
서울을 점령한 중공군은 제4차 공세를 시작하면서 서울 남방 중부전선에서 방어전을 펼치던 미8군을 고립시키기 위해 또 다른 주력부대를 중부전선으로 보내 북한군과 합류시켜 유엔군의 동서 연결을 차단하려 했었습니다. 그래서 미 제2보병사단이 지키던 원주는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지켜야 하는 전략적 요충지가 되었고, 이후 원주에서는 북한군 제5군단과 미 제2보병사단은 뺏고 뺏기는 공방전을 계속해야 했습니다. 1월 7일 북한군이 원주를 점령하자, 미군은 프랑스 및 네덜란드 부대와 함께 육탄전 끝에 원주 남방의 247고지를 점령하고 1월 17일 원주에 있던 북한군을 몰아냈지만, 유엔군은 유엔군의 남쪽 후방에 침투해 있던 북한군 제2군단과 힘든 유격전을 치른 후에야 원주를 완전히 재탈환할 수 있었습니다.
1951년 2월 중순의 경기도 양평군 지평리 일대에서 벌어진 지평리 전투도 같은 맥락의 전투였습니다. 당시 유엔군은 평택-원주-삼척 선에서 후퇴를 멈추고 방어전을 펼치고 있었습니다. 중공군 제39군 예하 4개 사단이 유엔군을 동서로 분리시키기 위해 중부전선 지평리에 주둔하던 유엔군을 공격했지만, 미 제2사단 23연대, 미 제1기병사단 5기병연대, 프랑스 대대 등은 수십 차례 중공군의 파상공세를 막아냈고, 중공군은 결국 2천여 구의 시신을 남기고 퇴각했습니다. 이 전투는 부상을 당하고도 후송을 거부한 채 끝까지 싸운 미 23연대장 프리먼(Paul Freeman) 대령, 중공군과 백병전을 벌이면서 진지를 사수했던 프랑스군 대대의 몽클레르(Ralph Monclar) 중령 등 많은 전쟁영웅들을 탄생시켰습니다. 지평리 전투는 미 육사 교재에 게재되었고, 프리먼 대령은 후일 대장까지 진급했습니다. 몽클레르 대대장은 드골 대통령의 오랜 친구이자 1, 2차 대전 참전용사로 육군 중장으로 전역한 후에 6·25 참전을 자원하여 스스로 네 계급이나 자진 강등하여 중령으로 프랑스군 대대장을 맡은 참 군인이었습니다. 유엔군이 원주 전투와 지평리 전투에서 승리하여 중부전선을 지킴으로써 서부전선의 유엔군을 포위·압박하려던 중공군의 전략은 무산되었고, 이후 한국군과 유엔군은 재반격을 개시하여 서울을 재수복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1951년 겨울에 일어났던 일들, 참담했던 1·4 후퇴, 중공군의 제4차 공세, 원주전투, 지평리 전투 등 중부전선에서의 격전, 서울을 재수복한 유엔군 측의 울프하운드 작전과 썬더볼트 작전 등을 결코 잊을 수 없습니다. 그 중에서도 1·4 후퇴 시 서울의 텅 빈 거리들을 잊을 수 없습니다. 서울 시민들은 첫 번째 공산 치하에서 북한군의 만행을 경험했고 그래서 1·4 후퇴시 너도 나도 모두 피란길에 올랐던 것입니다. 우리는 아장아장 걷는 아이들이 강추위 속에서 울면서 한강을 건넜던 모습들을 뇌리에서 지울 수 없습니다. 72년 전 겨울 이 땅에서 벌어진 일들은 결코 반복되어서는 안 되는 우리의 역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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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우, 에디터 오중석,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