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년전 오늘 북한 근해에서는 제2의 6.25 전쟁을 유발할 수도 있었던 큰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그러니까 1968년 1월 23일 미 해군 소속의 960톤급 정보함인 푸에블로호가 북한군에 의해 나포된 것인데, 미 해군 역사상 처음으로 함정이 납치된 사건이었습니다.
푸에블로호는 원산앞 공해 상에서 정보수집활동을 하다가 4척의 북한 초계정과 2대의 미그기들에 포위되어 원산항으로 끌려갔고, 승무원 83명도 북한에 억류되었습니다. 사건이 발생하자 미국의 존슨 대통령은 베트남으로 향하던 핵추진 항모 엔터프라이즈호와 3척의 구축함에게 진로를 바꾸어 원산만 부근에 대기하라고 명령했습니다. 25일에는 해공군의 예비역 14,000여 명에게 긴급 동원령을 내리고 전투기를 비롯한 항공기 372대에 출동태세를 갖추도록 했으며, 오산과 군산기지에 2개 전투기 대대를 급파했습니다. 28일에는 추가로 항공모함 2척, 구축함 1척, 잠수함 6척 등을 동해로 이동시켰습니다.
이와 함께 미국은 군사정전위를 통해 북한에 항의했으며, 곧 이어 미국과 북한 간 비밀협상이 시작되었습니다. 결국 이 사건은 30여 차례의 회담 끝에 피랍 11개월만인 1968년 12월 23일 판문점을 통해 승무원 82명과 사망자 1명의 시신을 인수받음으로써 마무리되었습니다. 나중에 밝혀진 일이지만, 푸에블로호 피랍 직후 미국은 군사보복을 검토하기 위해 초음속 정찰기로 수 차례에 걸쳐 북한지역을 샅샅이 정찰했습니다. 정찰에 투입된 항공기는 일본 오키나와의 카데나 공군기지에 배치되어 베트남 정찰임무에 투입되던 A-12 초음속 정찰기로 속도가 음속 3.2에 달했습니다. 이 정찰을 통해 미국은 만약의 경우 파괴해야 할 북한내 공군기지, 미사일 발사장, 해안방어시설, 산업지대 등 수백 개의 목표물을 확인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미국이 대북 군사보복을 보류한 채 인내심을 가지고 북한과 협상을 계속함으로써 군사충돌을 피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었지만, 어쨌든 북한의 푸에블로호 나포는 위험천만한 모험이었습니다.
이 사건을 전쟁을 유발할 수 있을 만큼 심각한 것으로 평가했던 또 하나의 이유는 그 무렵 북한군의 도발이 극심했기 때문입니다. 푸에불로호 피랍 이틀 전인 1968년 1월 21일에는 김신조를 위시한 북한군 정찰국 소속 31명의 특수부대원이 한국의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해 청와대 뒷산까지 침투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들은 한국군의 복장과 수류탄 및 기관단총으로 무장하고 1월 17일 밤에 군사분계선을 넘어와 수도권에 잠입했습니다. 한국의 군경이 1월 31일까지 소탕작전을 벌여 29명을 사살하고 한 명을 체포했지만, 한 명은 북한으로 도주했습니다. 한국군은 보복공격을 계획하고 비밀리에 특수요원들을 훈련시켰지만, 70년대 이후 미국과 소련 사이에 데탕트가 조성되면서 보복공격을 실행하지 않았습니다.
1960년대 북한의 군사적 모험은 그 정도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푸에블로호 협상이 진행 중이던 1968년 10월 북한은 120명의 무장 게릴라를 한국의 울진·삼척 지역에 침투시켜 다시 한번 한반도를 발칵 뒤집어 놓습니다. 이는 6.25 전쟁 이후 최대 규모의 무력도발로서 한국군은 2개월에 걸친 소탕작전을 통해 113명을 사살하고 7명을 생포했는데, 게릴라들의 만행으로 한국도 수십 명의 민간인이 사망하고 수십 명이 부상당하는 피해를 입었습니다. 푸에블로호 사건이 마무리된지 4개월 만인 1969년 4월 15일에는 북한 동해안에서 90km이상 떨어진 해상에서 전파감청 활동을 하고 있던 미국의 조기경보기 EC-121 워닝스타기가 북한 공군의 미그-21 전투기에 의해 추락하여 탑승자 31명 전원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번에도 미국의 닉슨 행정부는 항모 엔터프라이즈호를 급파하고 전술핵을 사용한 보복공격을 검토했지만 실행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렇듯 1960년대 말은 대한민국에게 참으로 암울했던 시기였습니다. 극빈의 나라로서 먹고 살기가 무척 힘든 가운데 북한의 연이은 군사도발로 살얼음판을 걸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은 경제기적을 통해 경제강대국이 되었고, 지금은 남과 북이 만나 경제교류를 얘기하는 좋은 시절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북한이 나쁜 마음을 먹으면 한반도 상황은 언제든 돌변할 수 있습니다. 북한이 다시 군사도발에 나서 긴장을 고조시킨다면 모처럼 가지게 된 화해협력의 희망은 영영 무산되고 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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