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이 한창이던 72년 전 2월은 참으로 잔인한 달이었습니다. 중공군이 제3차 공세를 통해 1월 4일 다시 서울을 점령하자 유엔군은 평택∼원주∼단양∼정선∼삼척을 연결하는 북위 37도선까지 후퇴하여 서울 재탈환을 위한 반격작전을 준비했습니다. 그때부터 서울을 재수복했던 3월 16일까지 서부전선과 중부전선에서 혈전이 이어졌습니다. 유엔군 측은 서부전선에서 울프하운드 작전과 썬더볼트 작전을 그리고 중동부에서는 라운드업 작전을 전개했지만 이에 대항하여 중공군이 제4차 공세에 돌입함에 따라 중부전선의 횡성, 원주, 지평리 등에서 밀고 밀리는 혈전이 벌어지게 됩니다.
울프하운드 작전은 유엔군이 평택-수원 간 서부전선의 중공군의 규모와 배치를 파악하기 위해 1월 15일부터 25일까지 수행한 수색정찰 작전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유엔군은 서울을 점령한 중공군이 지친 상태이고 수원-여주 이남 지역에는 소규모 부대만을 배치하고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사실 이 무렵 중공군은 조중연합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가 1월 8일자로 내린 ‘유엔군 추격 정지’ 명령에 따라 숨고르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보급선이 길어지고 수만 명의 전사자, 동상자, 도망병 등이 발생한 상태여서 보급, 장비, 병력 등을 보강하지 않고는 남진을 계속하기 어려운 처지였습니다. 이를 간파한 유엔군은 1월 25일부터 썬더볼트 작전으로 반격을 전개하여 남한산성을 제외한 한강 이남의 대부분을 탈환하는데 성공합니다.
썬더볼트 작전은 강인한 전의로 무장한 8군 사령관 리지웨이 장군이 미 제1군단 제25사단과 9군단을 선봉에 세우고 한국군 1사단을 후속부대로 투입하여 강력한 공중지원과 전차 및 포병 전력을 앞세우고 성남의 불곡산, 용인의 법화산, 하남의 검단산, 안산의 수리산, 의왕의 모락산 등에서 중공군에게 패배를 안기면서 서울 재탈환의 여건을 조성한 분수령적인 작전이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튀르키예군의 전투가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미 25사단에 배속된 튀르키예 여단은 1월 26일 용인시 인근 151고지에서 저항하는 중공군을 향해 "알라후 아크바르," 즉 “알라는 위대하다”라고 외치면서 착검 돌격전을 펼쳐 대승을 거두는데, 튀르키예 연대는 나중에 트루먼 미 대통령으로부터 부대표창을 받게 됩니다. 이와 동시에 유엔군은 중동부 전선에서는 한국군을 선봉에 세우고 미 제10군단을 후속부대로 투입하여 2월 5일부터 라운드업 작전을 전개하게 되는데, 이는 서부전선의 썬더볼트 작전과 보조를 맞추면서 한강 남안에서 중부의 홍천으로 연결되는 선까지 전선을 밀어 올림으로써 서울 재탈환을 위한 여건을 조성하고자 함이었습니다.
한편, 서부전선에서 유엔군의 썬더볼트 작전에 밀려 한강 이남을 포기한 중공군은 가평, 홍천, 양평, 횡성 등 중동부 전선의 유엔군 돌출부에 공격을 시작하는데 그것이 2월 11일에 개시된 중공군의 제4차 공세였습니다. 이 공세로 인하여 중부전선에서 라운드업 작전을 펼치던 한국군 제5사단, 제8사단, 미 10군단 등이 중공군과 격돌하게 되는데, 한국군이 횡성전투에서 패배하여 많은 손실을 입지만 유엔군이 지평리와 원주 전투에서 중공군을 저지함으로써 제4차 공세에 실패를 안깁니다. 그 과정에서 2월 11~12일 양일 간에 치러진 강원도 횡성전투는 한국군에게 뼈아픈 패배를 안겨주었습니다. 라운드업 작전을 펼치던 한국군 8사단은 중공군 제42군단 제124사단과 제66군단의 포위공격을 받아 일방적인 수적 열세 속에서 지휘통신이 두절되고 고립되어 사실상 붕괴되었으며, 이런 전황을 잘 모르고 제8사단을 지원하기 위해 출동했던 미군 지원부대도 장비들을 버리고 산악능선을 따라 철수해야 했습니다. 7천여 명의 전사자 및 실종자를 기록한 제8사단은 나중에 대구로 이동하여 재편성 작업에 들어가게 됩니다.
하지만, 중공군의 공세가 횡성 남쪽의 원주와 지평리에서 저지되면서 중동부 전선에서의 승리를 통해 서부 전선의 유엔군을 압박하려 했던 펑더화이의 계획은 무산되고 맙니다. 원주 전투에서는 미 제2보병사단, 프랑스 부대, 네덜란드 부대 등이 북한군 제5군단 및 제2군단을 평정했고, 지평리에서는 미 23연대, 미 제1기병사단 5기병연대, 프랑스 대대 등이 중공군 제39군 예하 4개 사단에게 쓰라린 패배를 안겨주었습니다. 이후 중동부 전선의 유엔군과 한국군은 서부전선의 아군들과 연결선을 유지하면서 북진을 계속하여 3월 16일 꿈에 그리던 서울 재수복을 달성하고 3월말에 다시 38선을 돌파하게 되지만, 중공군의 제5차 공세와 맞닥뜨리게 됩니다. 72년 전 2월은 정말 잔인한 달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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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우, 에디터 오중석,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