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우] 거제도 포로수용소 반란과 반공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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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70년 전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발생한 북한군 포로들의 반란 사건과 이후 반공포로들의 운명에 대해 회상해 보는 시간을 가져보고자 합니다.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2월 거제도에는 북한군 13만 명과 중공군 2만 명 도합 15만 명의 포로가 수용되어 있었는데, 수용소 내에는 크고 작은 폭동들이 빈발하고 있었습니다. 통상 포로수용소 폭동이란 포로들을 학대하는 경비병과 이에 항의하는 포로들 간 충돌을 말하지만 거제도의 양상은 많이 달랐습니다. 폭력 사태의 주된 원인은 휴전 후 북한으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친공포로와 공산주의 체제를 싫어하여 남한에 남기를 원하는 반공포로들 간의 주도권 다툼과 친공포로들의 폭력성이었고 그래서 이승만 정부는 반공포로 처리 문제로 고심을 거듭하고 있었습니다. 친공포로들이 반공포로들을 살해한 뒤 시체를 조각내 맨홀이나 화장실에 버리는 살육행위도 빈번했습니다. 이런 현상은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독일군에 붙잡힌 연합군 포로나 유태인들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유엔군측은 친공포로와 반공포로를 구분하는 조사를 벌렸고, 친공포로들은 조직체를 만들어 조사를 훼방했습니다. 1952년 2월 18일 반란은 유엔군 조사단이 조사를 위해 제62동 수용소에 들어갔을 때 건물을 장악하고 있던 친공포로들이 일제히 폭력을 행사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이 사태로 유엔군 1명이 사망하고 38명이 부상을 당했고, 포로도 70여 명이 사망하고 140여 명이 부상을 당합니다. 이후 제8군사령관 밴플리트(James Van Fleet) 장군은 수용소 규율을 확립하기 위해 돗드(Francis T. Dodd) 준장을 수용소장으로 내려 보내지만 친공포로들은 경비병들에게 무차별 투석을 하는 등 폭력을 그치지 않았습니다. 5월 7일에는 자신들의 면담 요구에 응하여 막사로 온 돗드 소장을 인질로 잡는 사건까지 발생합니다. 이렇듯 흉포한 친공포로들 때문에 유엔군 측의 경비병 규모가 1만 5천 명까지 늘어나기도 했습니다.

이듬해인 1953년 6월 18~19일엔 이승만 대통령이 전국 각지의 포로수용소에서 남한에 남기를 원하는 반공포로 3만 5천여 명을 풀어주는 일이 발생합니다. 이 결정은 6월 8일 판문점 휴전회담에서 유엔군 측과 공산군 측이 합의한 포로송환협정과 무관하게 결행되었기 때문에 미국을 당황스럽게 만듭니다. 유엔군 측이 이들을 다시 잡아들여야 한다고 했지만, 남한 국민들은 한국군 경비병들의 방조 하에 수용소를 나온 반공포로들에게 옷을 갈아입히고 침식을 제공하는 등 정착을 도왔습니다. 이렇게 해서 한국 사회로 나온 반공포로들은 장사를 해서 돈을 벌어들인 사람, 기업을 일군 사람, 기독교에 귀의하여 목사가 된 사람 등 다양한 직업에 종사하면서 대한민국 국민으로 생을 누려왔습니다. 거제도 반공포로 출신 기독교인들의 모임인 기독신우회는 지금도 모임을 갖고 있습니다.

반공포로 석방에 대해 역사가들은 이승만 대통령이 휴전에 반대하는 국민적 열망을 반영한 것이라는 해석을 내놓기도 했고, 공산주의를 거부하는 반공포로들을 북한으로 돌려보내는 것을 비인도적 처사라고 믿는 이 대통령의 이념적 결단으로 해석하기도 했습니다. 한미동맹조약을 끌어낸 고도의 외교적 승부수로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후 70여 년간 동맹이라는 안보방패가 가져다 준 안정 위에서 한국은 세계 10대 경제대국이라는 위업을 달성했습니다.

하지만 북한에 억류된 한국군 포로들의 운명은 이와는 많이 달랐습니다. 1953년 휴전협정 체결 이후 교환된 포로의 숫자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북한이 남쪽으로 송환한 포로는 한국군 8,343명 유엔군 5,126명으로 도합 13,469명이었고, 유엔군이 송환한 포로는 북한군 76,119명 중공군 7,139명 도합 83,258명이었습니다. 당시 유엔사령부는 포로로 붙잡히거나 실종된 한국군을 8만 2천여 명으로 발표했는데 풀려난 포로가 8,300여 명뿐이었으니 북한이 많게는 7만 명 이상, 적게는 4~5만 명의 한국군 포로들을 북한에 억류한 것이었습니다. 억류된 한국군 포로의 대부분은 평생 ‘괴뢰군 포로’ 또는 ‘성분 불량자’라는 딱지가 붙여진 채 탄광의 발파공, 불발탄 처리, 벌목공 등 험하고 고된 일을 하면서 인간 이하의 삶을 살다가 생을 마감했습니다. 이 사실은 1994년 이후 북한을 탈출하여 한국에 온 80여 명의 한국군 포로들의 증언에 의해 밝혀졌습니다. 재미 국군포로송환위원회 등 여러 단체들이 국제형사재판소(ICC)와 유엔 인권위원회(UNHCR)에 북한의 불법적인 포로 억류를 고소하고 송환을 요구했지만, 북한은 “북쪽에 남아있는 한국군 포로는 한 명도 없다”는 공식 입장만을 반복해 왔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전쟁이 끝난 지가 70년이 되어가니 이제는 생존 한국군 포로는 얼마 되지 않을 것입니다. 유엔의 북한인권조사위원회(COI)는 2014년 보고서를 통해 6·25전쟁 중 최대 7만 명의 한국군 포로들이 북한에 억류되었고 그중 500여 명이 생존해 있다고 추산했습니다. 2004년 탈북하여 51년의 북한 억류 생활을 마감하고 한국 땅을 밟은 이원삼 씨는 사망 전에 지금도 200명 미만의 한국군 포로들이 살아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원삼 씨는 2021년 7월 16일 9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포성이 멎은 지 70년이 되어 가지만 6·25 전쟁이 남긴 아픔은 아직도 곳곳에 서려 있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김태우, 에디터 오중석,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