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12일 정원식 전 국무총리가 향년 92세로 별세했습니다. 정 전 총리는 서울대 사범대 교수로 재직 중 1988년 노태우 정부에 발탁되어 문교부 장관을 지냈고, 1991년 6월에 제23대 국무총리에 올라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를 서명했습니다. 1995년에는 민선 1기 서울시장 선거에 출마했다가 낙선한 후 1997년에는 대한적십자자사 총재를 지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정 전 총리를 선명하게 기억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가 1990년대 초반 남북대화의 주역이었다는 사실입니다. 1990년대 초반은 세계적으로 냉전이 끝나고 한반도에 남북대화가 꽃피었던 시기였습니다. 공산주의 진영의 맹주인 소련의 붕괴와 함께 경제적 어려움에 직면한 북한은 남북대화를 통해 돌파구를 찾기를 원했고, 그래서 성사된 것이 1991년 남북한의 유엔 동시 가입, '남북기본합의서,' '한반도 비핵화공동선언' 등이었습니다.
통상 남북기본합의서로 불리는 '남북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는 1991년 12월 13일 서울에서 개최된 제5차 남북고위급회담에서 한국의 정원식 국무총리와 북한의 연형묵 정무원 총리가 서명한 것으도 총 4장 25조항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남북화해를 다룬 제1장에서 남과 북은 상호 체제 인정, 내부문제 불간섭, 판문점 연락사무소 설치 등에 합의했고, 남북 불가침을 다룬 제2장에서는 무력사용 포기에 합의했고, 제2장 11조에서는 1953년 정전협정에 규정된 군사분계선과 지금까지 쌍방이 관할하여 온 구역을 불가침 경계선으로 하기로 합의했습니다. 제3장에서는 남북 교류.협력을 위해 각 분야에서의 교류, 왕래 촉진, 이산가족 상봉, 철도 및 도로 연결 등에 합의했습니다. 비슷한 시기인 1991년 12월 31일 채택된 '한반도 비핵화공동선언'은 여섯 개 조항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핵심은 남과 북이 핵무기는 물론 핵무기 제조의 중요 공정인 재처리 시설과 우라늄 농축시설을 보유하지 않기로 합의한 것이었습니다. 기본합의서와 비핵화공동선언은 평양에서 제6차 남북고위급회담이 열린 1992년 2월 19일 발효되었습니다.
이렇듯 남북이 합의하고 서명했던 기본합의서와 비핵화공동선언은 지키기만 한다면 한반도 평화정착에 획기적인 디딤돌이 될 충분한 내용들을 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2020년 현 시점에서 되돌아볼 때 북한에게 있어 이런 합의들은 어려운 순간을 넘기거나 시간을 벌기 위한 용도였을 뿐 지키기 위한 것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기본합의서 이후 한국의 김영삼 정부는 비전향 장기수인 이인모 노인을 송환하고 쌀을 지원하는 등 유화정책을 지속했지만, 북한은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핵사찰을 거부하고 핵무기비확산조약(NPT) 탈퇴를 선언하는 등 위기를 조성했습니다. 이 위기는 1994년 미북 간 제네바핵합의(Agreed Framework)를 통해 일시 해소되었지만, 이후에도 북한의 핵무장 행보는 지속되었습니다. 기본합의서 제11조에서 쌍방이 관할해온 구역을 불가침 경계선으로 하기로 합의했지만, 북한군은 정전이후 한국이 관할해온 북방한계선(NLL)을 침범하여 1999년 제1차 연평해전과 2002년 제2차 연평해전을 도발했고, 1999년에는 기존의 경계선을 무시한 서해해상경계선이라는 것을 일방적으로 발표했습니다. 북한은 핵무기와 농축•재처리를 상호 포기하기로 합의한 비핵화공동선언을 사문화시키고 재처리와 농축을 통해 핵무기를 만들어 여섯 번이나 핵실험을 한 핵보유국이 되었습니다. 이 합의를 준수하여 핵무장을 포기하고 있는 한국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입니다.
남북기본합의서를 회상한다면, 북한의 연형묵 정무원 총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원식 총리보다 세 살 아래인 1931년생인 연 총리는 만경대혁명학원과 체코의 프라하공대를 나온 혁명 2세대 엘리트로서 1988년 총리에 올라 남북대화의 북측 대표로 활약했습니다. 북한의 경제개혁을 촉구했던 그는 남쪽에서도 실용적이고 개방적인 인물로 알려졌습니다. 이제는 모두 고인이 된 분들이지만, 남쪽의 정원식 총리나 북쪽의 연형묵 총리는 자신들이 서명한 남북기본합의서가 휴지조각이 되어버린 현실에 씁쓸함을 느끼면서 말년을 보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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