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우] 빛 바랜 러시아의 전승기념일 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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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9일은 러시아의 ‘위대한 애국전쟁(The Great Patriotic War)’ 전승절이었습니다. 즉 77년 전 소련군이 나치 독일군의 항복을 받아낸 2차 대전 전승기념일로서 러시아는 매년 성대한 전승행사와 함께 모스크바의 붉은광장에서 열병식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우크라이나 전쟁 중에 치러진 금년의 열병식은 왠지 빛이 바랜 모습이었습니다. 열병식에 등장한 병력과 장비도 예년보다 적었고 정신적, 육체적으로 지친 모습으로 등단한 푸틴 대통령의 연설에도 강렬함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열병식에는 130여 대의 군사장비들이 동원되었지만 서방을 긴장시킬 위협적인 신무기를 선보인 것은 아니었고, 매 열병식에서 핵전쟁 지휘기인 일류신(IL-80) 폭격기와 전투기들이 모스크바 상공을 누비며 위용을 자랑했던 공군 퍼레이드도 없었습니다. 푸틴 대통령은 12분짜리 연설을 통해 미국과 나토의 위협으로 인한 ‘특별 군사작전’의 정당성과 불가피성을 강조함으로써 우크라이나 전쟁을 지속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지만, 그가 원래 말하고 싶어했던 것들이 대부분 빠진 다소 무기력한 내용이었습니다. 서방이 우려했던 대(對) 우크라이나 선전포고나 총동원령은 없었습니다. 밀고 밀리는 공방전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승리를 선언할 수도 없었고, 자국 내 반전 여론이 만만치 않은 여건에서 국민의 희생을 요구하는 열변을 토하지도 못했습니다. 침공의 명분으로 주장했던 ‘탈나치’를 강조하지도 않았습니다. 우크라이나의 젤렌스키 대통령이 유대인의 후손인 마당에 ‘탈나치’를 위해 군사작전을 벌였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현실과 동떨어진 말인지는 푸틴 본인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입은 인명 손실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러시아는 3월 27일 전사자가 1,351명이라고 밝힌 이후 전사자 규모에 대해 줄곧 침묵하고 있지만 서방 전문가들은 전사자를 1만 5천~2만 명으로 추정합니다. 일주일이면 끝낼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던 전쟁이 지루한 소모전이 되면서 러시아군의 병력 및 장비 손실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는 형국입니다.

이런 중에 러시아가 세계 최강으로 자랑하는 신형 전차와 장갑차들은 미국제 또는 영국제 대전차 미사일, 터키제 드론 등에 의해 연달아 파괴되고 있고, 전투헬기들은 폴란드제 견착식 대공무기에 의해 추락되고 있으며, 흑해의 함정들도 우크라이나군의 지대함 미사일에 의해 피해를 보고 있습니다. 이렇듯 우크라이나군은 서방국들이 제공하는 무기로 러시아군의 대형 무기들을 격파하는 ‘저비용 고효율’ 소모전을 벌이고 있어 향후 전세도 밝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요컨대 푸틴 대통령의 열병식 연설은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한 세계의 따가운 시선, 최종 승리의 불확실성에 대한 불안감, 제대로 훈련받지 않은 신병들을 죽음의 전선으로 내몰고 있는 것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 전쟁으로 인해 어려워지고 있는 경제와 국민의 삶,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해 자신과 자신의 나라가 너무나 많은 것을 잃고 있는 현실에 대한 회환 등을 두루 반영하는 듯 했습니다.

실제로 푸틴 대통령을 바라보는 세계의 시선은 매우 부정적입니다. 푸틴은 우크라이나 침공을 ‘특별 군사작전’이라고 부르지만 대부분 나라들은 멀쩡한 이웃 나라를 쳐들어가 파괴와 살상을 벌이는 ‘공연한 전쟁(unprovoked war)’이자 전쟁범죄로 보고 있습니다. 푸틴은 “나토의 확대로부터 나라를 수호하기 위한 정당하고 올바른 행동”이라고 주장하지만, 서방국가들의 눈에는 헌법 개정으로 평생 집권의 길까지 터놓은 상태에서 22년간 철권통치를 하고 있는 러시아 절대권력자가 세계의 절반을 호령했던 소비에트 제국의 향수에 젖어 벌인 도박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스웨덴과 핀란드가 나토(NATO)가입을 서두르고 있는 것도 푸틴 대통령을 우울하게 만들고 있는 것 같습니다. 푸틴이 나토의 확대를 저지하기 위해 시작했다는 군사작전이 오히려 나토의 확대를 촉발하고 있음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열린 전승절 행사가 온 국민과 세계의 축하 속에 열리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푸틴 대통령이 하루 빨리 의미 없는 죽음의 행진을 멈추고 정상으로 돌아오는 결단을 내려줄 것을 희망합니다. 사실 대한민국에서 새로운 정부가 출범하고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방한하는 시점에 맞추어 미사일을 쏘아 대는, 북한에 대한 세계의 시선도 싸늘합니다. 북한도 하루 속히 비정상적인 행보를 멈추고 정상으로 돌아오기를 희망합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김태우, 에디터 오중석,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