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우] 이산의 한을 안고 하늘나라로 가신 송해 선생

10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서 열린 '국민 MC' 방송인 고 송해의 영결식에서 설운도, 이자연, 문희옥 등 대한가수협회 가수들이 헌화를 마치고 유족들을 향해 인사하고 있다.
10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서 열린 '국민 MC' 방송인 고 송해의 영결식에서 설운도, 이자연, 문희옥 등 대한가수협회 가수들이 헌화를 마치고 유족들을 향해 인사하고 있다.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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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최고령 가수이자 연예인이고 한국 방송 역사의 산 증인인 송해 선생이 향년 95세로 별세했습니다. 고인은 지난 6월 8일 오전 8시 30분경 서울 강남구 도곡동 아파트에서 쓰러진 채 발견되어 긴급 출동한 소방대원에 의해 병원으로 이송되었지만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북한에 남겨 둔 어머니와 여동생을 그리면서 평생을 살아왔던 송해 선생은 나이가 많아지면서 죽기 전에 고향에서 노래자랑 대회를 열고 싶어 했지만 그 소원을 이루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본명이 송복희인 송해 선생은 1927년 황해도 재령군에서 출생하여 1949년 해주예술전문학교 성악과에 입학하여 노래를 시작했으나,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인민군의 징집을 피해 피신했다가 1952년 1·4 후퇴 때 미군의 탈출선을 타고 월남했습니다. 그는 산에서 피신 생활을 하면서 몇 번씩 집에 들렀는데, 세 번째로 피신에 들어갈 때 어머니가 “복희야 부디 몸조심해라”라고 당부하신 것이 모친과 나눈 마지막 대화였습니다. 부산에 도착한 송해는 한국군에 입대하여 통신병으로 복무했으며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되었을 때에는 협정문을 모스 부호로 전송하는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송해 선생은 1955년부터 창공 악극단을 통해 가수 겸 배우로 데뷔했고, 1960년대부터는 코미디언 겸 방송 MC로 최고의 인기를 누렸으며 수많은 영화, TV 드라마, 방송 프로그램 등에 출연하여 전 국민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특히 1988년부터 별세하기 직전까지 총 34년 동안 KBS 1 TV의 <전국노래자랑>을 진행하면서 국내는 물론 로스앤젤레스, 도쿄, 베이징, 뉴욕, 런던 등 한국인이 거주하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서 공개방송을 진행하여 지난 4월 최고령 ‘TV 음악 경연 진행자’로 기네스 세계기록에 등재되기도 했습니다.

송해 선생은 남쪽에서 성공한 연예인으로 살면서도 늘 통일이 되어 가족을 만나는 희망을 포기한 적이 없었습니다. 1998년 금강산 관광이 시작되었을 때 송해는 2박 3일 일정으로 금강산행 배를 탔지만 북한 당국이 배에서 내리지 못하게 하여 떠나오기 하루 전에 겨우 배에서 내려 46년 만에 북한 땅을 밟아 볼 수 있었습니다. 송해 선생은 2003년에도 <평양 전국노래자랑> 촬영을 위해 평양에 가서 당시 조선중앙TV 아나운서 전성희와 함께 진행했지만, 북한 측에서 송해 선생의 월남 이력을 문제 삼아 체류 비자를 내주지 않으려 하여 기획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기도 했습니다. 송해는 마지막 곡으로 「다시 만납시다」가 합창으로 흘러나오자 눈물을 흘렸고, 방송 후 만찬에서 어머니와 여동생을 보고 싶다고 하자 동석한 북한 보위원으로부터 “시간이 많이 흘러 거기에 안 계신다”는 답을 들었다고 합니다. 이 때 송해 선생은 더 이상 어머니를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크게 절망했다고 합니다.

국민 MC 송해 선생을 모신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는 윤석열 대통령을 대신하여 박보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조문했고 수많은 후배 연예인들의 발길도 이어졌습니다. 인터넷 공간에서도 고인을 추모하는 글들이 홍수를 이루었습니다. 윤 대통령은 고인에게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했습니다. 송해 선생의 시신은 10일 새벽 엄영수, 유재석, 강호동, 이상벽, 설운도, 이자연, 김학래 등 연예계 후배들의 운구로 장례식장을 떠나 그가 평소에 즐겨 찾았던 국밥집, 이발소, 사우나 등이 있는 종로구 낙원동 ‘송해길’을 거쳐 영등포구 KBS 본관 앞에서 노제를 지낸 후 경북 김천시 소재의 화장장에서 화장되어, 2018년 먼저 세상을 떠난 고인의 부인이 영면한 대구광역시 달성군 옥포읍 기세리의 송해공원 인근에 안장되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6∙25 이산가족이자 참전용사였던 송해 선생, 이후 전국 방방곡곡과 세계 곳곳을 돌며 70년 세월 동안 국민과 함께 울고 웃었던 원조 ‘국민 MC’ 송해 선생은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한번 태어나면 언젠가는 가야 하는 것이 인생이라지만, 송해 선생이 그토록 원했던 소원들을 이루지 못하고 떠난 것이 무척 한스럽습니다. 그토록 원했던 통일을 보지 못했고, 그토록 만나보기를 원했던 어머니와 누이를 만나지 못했으며, 고향 땅 황해도 재령에서 노래자랑 대회를 열고 싶다고 했던 마지막 소원도 끝내 이루지 못한 채 이산의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하늘나라로 떠나고 말았습니다. 오늘따라 분단의 아픔이 더욱 심하게 느껴집니다. 송해 선생의 명복을 빌어 마지않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김태우, 에디터 오중석, 웹팀 이경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