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6일은 제64회 현충일이었습니다. 같은 6월 6일 지구 저쪽 프랑스에서는 노르망디 상륙 75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열렸습니다. 오늘은 호국보훈의 달에 기억해야 하는 남아프리카공화국 공군 장성 한 사람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지난 5월 19일 89세로 생을 마감한 데니스 어프(Denis J. Earp) 장군이 그 주인공입니다.
한국전쟁은 69년전 북한군의 기습적인 남침으로 발발하여 3년 동안 수백만 명의 인명피해를 발생시키고 한반도를 잿더미로 만들었던 비극적인 사건입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38선을 넘어 남침하자 유엔안보리는 25일 당일 북한에게 남침을 중단하고 즉각 철수할 것을 결의한 안보리결의 제82호를 채택했고, 북한군이 이를 무시하고 계속 남하하자 이틀 후인 27일 안보리결의 제83호를 통해 한국에 대한 군사지원을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7월 7일에는 유엔군의 깃발 아래 미군이 통합사령부를 구성하여 한국을 지원하도록 한 안보리결의 제84호를 채택하게 되고, 이후 미국을 위시한 16개국이 군대를 파견하게 됩니다.
남아공 정부는 1950 년 8 월 4 일 공군 전투단과 지상병력 파병을 통해 유엔 결정을 지원하기로 결정했고, 한국에 파병할 전투기 조종사들을 모집했습니다. 그리하여 장교 49명과 지원병력 206명으로 구성된 남아공 공군 제2 비행대대는 1950년 9월 26일 더반을 출발하여 한국으로 날아와 동부산 기지를 거쳐 진해에 주둔하게 됩니다. 제2비행대대는 1953 년 7 월 27 일 정전협정까지 총 12,067회의 출격을 기록하면서 적 차량 및 보급소 파괴, 건물•교량 폭격, 대공포 진지 파괴 등 수많은 공대지 및 고공차단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참전한 남아공 군인은 243 명의 공군 장교와 545 명의 지상병력을 포함한 총 800여 명이었으며, 그중 37 명이 한국전에서 전사했습니다. 현재 전사자 중 11 명의 유해는 부산 유엔기념공원에 안장되어 있습니다.
오늘의 주인공 데니스 어프 장군은 21세이던 1950년 8월 한국파병을 자원한 젊은 공군 조종사였습니다. 당시 남아공은 75회 출격을 마친 조종사들을 고국에 보내고 대체 조종사를 파견하는 방식으로 제2비행대대를 운용하고 있었는데, 데니스 소위는 1951년 9월까지 64회 출격을 무사히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10회의 출격만을 남겨두었습니다. 그러나, 1951년 9월 27일 65회째 출격에서 그는 중공군에 포로로 잡히고 말았습니다. 폭격 임무를 마치고 귀환하던 중 대공포에 피탄되어 그의 비행기가 폭발했기 때문에 그의 동료들은 그가 전사한 것으로 알았지만, 그는 이후 23개월동안 끔찍한 포로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평양 근처의 포로수용소로 끌려간 데니스 소위는 중공군과 인민군의 모진 고문을 견디며 살아 남았고, 이어서 압록강 부근의 수용소로 끌려 갈 때에는 여름옷을 입은 채 혹한의 눈길을 걸어가야 했는데, 당시 중공군은 추위와 굶주림에 지쳐 쓰러지는 포로들을 현장에서 사살했다고 합니다. 이후 데니스는 중공군의 전범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아 죽을 날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지만, 1953년 8월 3일 포로교환을 통해 풀려날 수 있었습니다. 귀국 후에도 그는 남아공 공군에서 조종사로 계속 복무하여 대장까지 진급하는데 공군 참모총장을 지낸 후 1988년에 퇴역했습니다. 한국정부는 그에게 충무무공훈장을 수여했습니다.
데니스 어프 장군이 서거하기 전 한국 공군의 관계자들은 남아공의 6•25 참전용사들을 돌아보는 기회를 가졌었는데, 그때 만난 어프 장군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제2차 대전을 보면서 자유를 억압받는 사람들의 고통을 똑똑히 보았습니다. 그래서 한국이라는 나라는 들어본 적이 없었지만 공산주의 침략자들로부터 한국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기로 결정했습니다. 내가 한국으로 간 이유는 그 뿐이었습니다.” 남아공은 참으로 먼 나라입니다. 인천에서 비행기를 타면 9시간을 날아 아부다비에 도착하고 거기서 다시 비행기를 갈아타고 10시간을 더 날아야 요하네스버그 공항에 도착합니다. 한국 국민은 이토록 먼 나라에서 와서 대한민국을 위해 싸워준 남아공 참전용사들을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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